블랙 러시안처럼.
이 바의 단골 중에는 S가 있다.
40대 중반 치고는 상당한 동안의 외모인 그는 실제로는 자녀가 셋이나 있는 [아버지]였다.
보름에 한 번 정도씩 꼭 바에 와서 맥주를 다섯 잔 정도 마시다가 일어나는데, 하루는 표정이 너무 어두워 말을 안 걸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는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자식 키우는 게 여간 쉽지가 않아요.
이야기를 이러했다. 세 자녀 중 첫째가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인데, 최근에 사춘기가 심하게 들어 가족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제가 키가 작아요. 170이 안되거든요. 근데 아들내미가 키가 180이 넘고 몸무게가 90kg이 넘어가니까 이제 아빠가 쉽게 보이는지, 요즘 무슨 말만 했다 하면 나한테 대들고 손을 올리려 들어요. 욕도 하고요.
나는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고자 의자를 당겨 앉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친구가 없어 보이고 그러진 않아요?
-친구 많아요. 같이 pc방도 가고 농구도 하고 그러는 거 보면.
-그러면 집에는 잘 들어와요?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그러진 않고요?
-집에는 제시간에 맞춰서 잘 들어와요.
나는 그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혹은 속되이 말하는 '일진'일까 궁금했었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없어 보였다.
-어쨌든 요즘 자꾸 집에서 싸우니까, 그냥 아이가 잠들기 전에는 집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괜히 마주하면 싸우니까...
그의 말을 내내 듣던 나는 물었다.
-요즘 마주하면 무슨 말이 오갔었어요?
-뭐, 별 거 있나요. 그냥 방 청소 좀 해라, 숙제했냐, 시험은 잘 봤냐... 이런 것들이죠.
나는 잠시 이 말을 해도 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그에게 말해보았다.
-음... 제가 듣기에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질문들이면.
내 말에 그는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어 말했다.
-검사받는 기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직접 그 얘기를 들은 건 아니니 저는 모를 일이지만, 아이가 불편할만한 질문들인 건 맞아요.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들이기도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또 한 부분이 떠오른 듯 맥주를 크게 들이켜고 미간을 주름잡으며 토로했다.
-저는요, 참 열심히 살았어요. 공부도 혼자 열심히 해서 학원 한 번 없이 전교권이었고, 악으로 깡으로 많은 걸 이루어냈어요. 근데 이 아들내미는 맨날 핸드폰 아니면 컴퓨터... 한심하다 이거죠. 신경을 안 쓸래야 안쓸 수가...
그는 말을 하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같은 핏줄이어도 다르다는 것을.
난 그를 위로해 주기로 했다.
-칵테일 하나 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심 없다는 듯 기본으로 나오는 땅콩을 연이어 집어먹었다.
나는 그에게 블랙러시안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온 더락 잔에 얼음으로 미리 칠링 한다
보드카(보통의 경우 앱솔루트 보드카) 1oz
깔루아 0.5oz (단 맛의 기호에 따라 조절해야 한다)
나는 그에게 스틱과 함께 블랙러시안을 내밀며 말했다.
-이 블랙러시안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입니다. 근데 참 신기한 게, 이 술에는 러시아의 그 어떤 것도 들어가지 않아요. 처음 만든 사람은 벨기에 사람이고, 보드카는 스웨덴 것을 쓰고, 깔루아는 멕시코에서 왔거든요.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몸에서 나왔다고 다 아버지와 같을 순 없지 않을까요. 첫째 아들이니까 기대하는 바도 크고 하시겠지만, 손님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제야 그는 블랙 러시안을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 녀석이 저와는 다르게 농구를 참 잘해요. 몇 학년 위도 이기고 이런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게 말했다.
-이번 주에는 그 녀석 농구화나 하나 멋진 걸로 사줘야겠습니다. 잘 마셨습니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바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