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했던 성악가의 말로
덥수룩한 머리의 남자가 패딩을 부여잡고 바에 들어와 앉는다.
그는 내게서 받은 메뉴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보곤 이내 작게 말했다.
- 맥주 한 잔... 주세요.
곧이어 내가 내민 맥주와 기본으로 나가는 땅콩을 씹으며 그는 말했다.
- 이리저리 다 봤는데, 그래도 구관이 명관인지 맥주가 제일 눈에 들더군요.
- 저도 다른 곳 가면 맥주 먼저 찾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는 내 동의가 감사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참 슬픈 눈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눈도 웃으니 따뜻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음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해왔고, 내일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의 말에 흥미를 보이며 더 듣고 싶어 했고, 그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 그렇게 궁금해해 주시니 시시콜콜하지만 제 얘기를 짧게 해 보자면, 저는 나름 유망했던 어린 성악가였어요.
그는 세계 무대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질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본인도 욕심이 들어 더욱 열심히 임했었다고 한다.
- 근데 참 녹록지가 않더군요. 다들 실력도 실력이고, 무엇보다 집안 상황도 제 세계무대까지는 무리였던 거죠.
그는 실력을 위해 무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는 곧 그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할 정도로 목을 상하게 했다.
- 오랫동안 쉴 수밖에 없었어요. 남들의 눈에 그래도 듣기 좋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제가 듣기에 제 목소리가 이미 지저분하고...
이야기와 함께 그는 어느새 맥주를 다섯 잔 째 들이켜고 있었다.
- 애매한 천재는 둔재만 못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금, 은, 동메달 중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건 동메달이라는 이야기요. 저 같은 사람한테는 그런 애매한 재능은 저주인 거죠.
- 그래도 은메달도 대단한 거잖아요.
- 그렇죠... 한두 번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운낼 수 있죠... 차라리 애초에 안 했더라면, 집안 사정도, 저도 다 무리할 일 없었을 텐데.
나는 빈 잔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맥주를 한 잔 사며 말했다.
- 더욱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셨을 텐데, 그 노력마저 스스로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내 노력을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는 맥주잔을 들며 감사하다는 듯 눈인사를 했고, 나는 그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말했다.
- 제가 볼 땐, 애매한 재능은 없어요. 애매한 방법이나 타이밍이 있으면 몰라도.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재능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꽃 피울지가 관건이겠죠.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네. 안 그래도 오늘 한 학교 성악부에 고문 선생님으로 첫 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어린 친구들을 보고 와서 그런가 괜히 옛 생각이 났네요.
- 잘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실패한 경험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데요.
그는 그렇게 마지막 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했다.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성악곡들을 들으며 잠을 청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는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가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