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감당 가능한 관계의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그 어떤 SNS의 친구 수 제한과 같은 느낌인데, 이를 알게 된 것은 갑작스레 내 관계의 크기가 커졌던 지난 2015년이었다.
당시 그저 홍대 앞 클럽들에서 다달이 공연을 다니던 나에게 대뜸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학과의 학생회장 자리가 부여되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괜찮은 인재라고 판단될 법도 했던 것이, 후배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는 모습과 강의실 분위기를 활기차게 리드하는 모습에 요즘 말로 소위 '인싸'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당시 그런 모습이 가능했던 건, 어차피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홍대로 날아가 공연할 생각에 수업 성적은 뒷전이었고, 성적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으니 모든 수업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 덕에 학사 경고를 두 차례 얻어맞는 웃지 못할 경험도 하게 되었지만).
학과의 소소한 행사도 늘 불참했던 나로서는 학생회장 자리가 놀라운 걸 넘어서서 어이없기까지 했다. 얼마나 하려는 이가 없으면 거의 외지인이다시피 한 날 끌어들일까. 그러나 이 소식을 부모님께 알려드렸을 때 "근데 그런 자리 맡으면 너의 음악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냐."는 걱정과는 별개로 미소를 띠시는 부모님의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보고도 싶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20명도 넘는 직원을 관리해 보았을 때, 난 제법 내가 사람들을 잘 관찰하고 다룬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3,400명의 학부생들은 내 관계의 무게를 초과하는 일이었다. 이제와 되돌아보면,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내가 내렸던 많은 선택들은 절대 최선은 아니었다. 후배들은 내게 실망하기 시작했고, 교수님들과는 불필요한 기싸움까지 하고 있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당시 우리 학과의 가장 높은 교수님(소위 학장이라 불리는)께서 자신의 수업을 위한 전공서적을 직접 발행하셨었다. 개정판이라고 나온 그 서적은 작년의 것과 일치율이 90%를 넘는 것으로 확인이 된 상황. 아이들은 당시 5만 원이 넘는 그 책을 새로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크다고 내게 찾아왔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한 아이는 내게 홀로 찾아와 좋지 못한 가정상황을 알려주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교수님께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말씀드렸고, 교수님은 분개하셨다.
"너희들이 지금 비싸다고 못 사겠다는 이 책값은 술 한번 먹는 돈 수준이다. 학생회장인 네가 앞장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실망스럽다."
당시 내가 교수님께 제안드렸던 것은 제본비를 과회비로 부담하겠다는 것이었고, 책을 팔고 싶으셨던 교수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다음 날 학생들은 내게 찾아와 제본을 쓰는 아이는 F학점을 주겠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의 속내가 마음에 걸렸던 나는 제본을 강행했고, 1년을 위해 꾸려지는 과회비는 예산에 없던 지출로 크게 흔들렸으며, 아이들은 교수님이 무서워 제본을 들고 다니다가 책을 구매했다. 과회비가 부족해지니 그날 이후의 행사들은 대폭 축소되었고, 나는 어느새 점점 작아져서 결국 임기말에는 후배들과 완전히 소통이 끊기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내 관계의 저울에 이 3,400명의 무게는 과했다고. 미움받을 용기도 부족했으며, 강단 있게 전진할 에너지도 부족했다.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다시 그런 자리가 주어진다고 이전보다 나을 거라 확신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최근 이때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열심히 사는 덕분에 새로운 관계들이 근래 급격하게 넓어지고 있는데, 점점 두 손으로 쥐기에는 과해져서 하나둘씩 흘리기 시작하고 있다. 관계의 일들을 즐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집에 돌아오던 골목에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한 반가움보다도, 멀어지는 관계에 대한 불안함과 찝찝함이 생각보다 버겁다. 평소 홀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그 시간조차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에 맘 편히 있지 못한다. 확실히 지금의 나는 불안정하고, 무겁고 버겁다.
하지만 몇몇 감정들이 그러하듯, 이 기분도 그 어떤 해소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렇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늙는 것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도 할 테니까.
그럼 그때의 나는 어떤 인상일까.
살아온 흔적들이 주름으로 그어진 그 얼굴에는 무슨 말들이 깃들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