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는 몇 가지 코드
<※이 글에는 소설의 줄거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은 유달리 후각에 민감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이 온다>를 보라. “환자복을 입은 몸을 맨 위에 쌓은 뒤 가마니로 덮고는 뒤로 물러섰어. 그들의 찌푸린 미간과 텅 빈 눈 두 쌍을 지켜보며 나는 알았어. 하루 사이 우리들의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품어져 나오고 있다는 걸.”
언젠가 이 소설을 읽고 “책을 읽는 내내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그 냄새는 주인공 동호가 그때, 그곳에서, 친구 정대를 찾으며 견뎌내야 했던 냄새”라고 후기를 남겼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 냄새의 발원지는 시체였다. 5.18 광주였다.
세 편의 연작(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진 소설 <채식주의자> 역시 후각을 자극한다. 제목대로라면 미각을 자극해야 할 텐데(하긴 후각과 미각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지만), 이 책 역시 자꾸 냄새가 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채식주의자>에서 냄새의 발원지는 고기다. 사람의 몸이다. 어느 날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는 남편과의 잠자리까지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라.
“뭐가 문제야?”
"……냄새가 나서 그래."
“냄새?”
"고기 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
“방금 못 봤어? 나 샤워했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1. 몸, 혹은 욕망과 관습
<채식주의자>는 몸에 대한 이야기다. 영혜는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고 하루가 달리 야위어 간다. 동시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채식주의자).
영혜는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로부터 작품의 모델을 제안받고 자기의 몸을 다시 되찾는다. 온몸에 꽃을 그리자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다시 몸이 되살아난다.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는다.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배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몽고반점).
끝내 몸(삶)을 포기한다.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는 굶고 야위어 피까지 토하면서도 끝내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나무가 되고자 한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 서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나무 불꽃).
2. 나무, 혹은 저항과 자유
몸은 욕망이다. 욕망의 상징이자 집합체다. 그것은 주로 타인의 욕망이다. 타인의 욕망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옥죈다. 영혜에게 육식과 브래지어는 그것의 상징이다. 그래서 채식과 토플리스는 욕망과 관습에 대한 거부다. 저항이다.
회사 간부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사장의 아내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영혜를 보며 '고기를 먹는 것은 수렵 생활 때부터 내려온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서야 되겠느냐는 모종의 타박이다. 타인의 욕망, 관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수렵 생활 때부터 내려온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여자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영혜의 채식주의 선언은 남편에게, 가족들에게 그런 의미로 읽힌다.
만약 영혜가 그저 육식을 피하고(끝내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남편과의 잠자리 거부하는 것으로만 욕망과 관습을 거부했다면 이 소설은 그렇고 그런 탐미주의 소설로 끝났을 것이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뛰어올라 이 소설이 '인간의 보편성'을 다뤘다는 평가까지 듣게 된 것은 바로 '나무'다. 나무처럼 말라가는 영혜가 나무가 되려 하는 것은 단순한 저항, 그 이상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 장면이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손을 자해하는 장면, <몽고반점>에서 영혜가 형부와 몸을 섞는 장면, <나무 불꽃>에서 영혜가 물구나무 서있는 장면. 몸과 욕망과 관습의 상관성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해당 장면의 묘사는 섬뜩하고 처연하다.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 대목인데도 가슴이 아팠다.
욕망을 억압하는 관습,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이 세 편의 연작이 처음 선보였을 때(채식주의자·몽고반점 2004년, 나무 불꽃 2005년)부터 거론됐던 내용이다. 맨부커상 심사위원들도 “한 평범한 여성이 자신의 집과 가족, 사회를 묶는 관습을 거부하는 과정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담아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3. 시선, 1인칭 남자에서 3인칭 '그녀'로
이 소설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점은 화자(話者)의 시선이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1인칭이다. <채식주의자>의 화자 ‘나’는 남편이다. 남편에게 아내 영혜의 채식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심지어 가정파괴다). 결국 남편은 영혜를 떠난다. <몽고반점>의 화자 ‘나’는 형부다. 형부에게 영혜의 몸은 자기의 예술과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형부가 처제인 영혜를 어느 날 욕망하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몽고반점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세 번째 연작인 <나무 불꽃>은 3인칭 소설이다. 화자 ‘그녀’는 언니다. 언니는 피를 토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문득 동생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한때 지우려 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스스로를 책망한다.
“그(자신의 남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어야 할 피일까.”
<소년이 온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채식주의자>도 편하지 않다.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인내를 요구한다. 김기덕 영화의 텍스트 버전을 읽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분출된 욕망과 억압된 욕망의 충돌을 끝까지 몰고 간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임계점까지 독자를 끌고 가서는 마침내 폭발한다. 한강의 소설이 탐미주의적으로(그리고 그 이상으로) 읽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너무 말라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되어버린 영혜는 끝내 나무가 되었을까? 상처로부터,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았을까? 그러길 빈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