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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May 16. 2016

어김없이, 5월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벼이 여기던 나날이여, 저주받으라.”




“어김없이 5월이다. 일종의 소모품으로 산화해간 그들의 죽음 위에 우리가 야구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질기게 살아 있다. 외면했거나 망각했거나 가르치지 않았거나 쉽고 편하게 장삿속으로 팔아치웠던 우리 모두 광주의 죽음 앞에 새삼, 유죄다. (광주는 아직도 광주다.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중에서).”


“엄마는 스무 살 무렵 우연히 광주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단다. (중략) 그리고 나는 그때 얼어붙은 듯했단다. 내 인생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과 본 이후로 나누어지고, 이제 나는 다시 그 사실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고통받는 이를 가벼이 여기던 나날이여 저주받으라.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 중에서).”


5.18 광주항쟁 당시 사진.
5.18 광주항쟁 당시 사진. 


기억은 비슷하다. 대학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다큐멘터리를 봤다. 당연히 책도 읽었다. 최초의 기억은 소설가 황석영이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다. 5·18 민주화 항쟁 10일간을 기록한 책으로, 같은 해 일본어판이 발간됐고, 1999년 영문판이 발간되기도 했다. 5월이 되면 다큐멘터리를 보고, 책을 보고,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광주로, 망월동으로 향했다. 그랬던 적이 있다.    


어느 해인지는 분명치 않다. 출발이 늦어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결지인 전남대에 도착했다. 밤안개가 어둠보다 더 짙게 드리워져 있던 전남대 대운동장에는 수 천명의 학생이 모여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들을 맞았다. 사회자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지만, 이 한 마디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불러온 것은 고립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고맙습니다.”




◇5.18을 후각으로 기억하는 소설


작년 초 읽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냈다. 이 책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임철우의 <봄날>, 홍희담의 <깃발> 이후 거의 처음 읽은 광주 관련 책이다. 광주를 다룬 소설과 영화는 많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는, 아니 나는, 불편해서 피하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외면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아직도 ‘광주’는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보다 학살을 주도했던(혹은 지시했던) 자들이 큰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살아 있다. 기념일만 되면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홍역을 치른다.  


5.18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을 진압하던 계엄군. 

 

어떤 소설은 시각을, 어떤 소설은 후각을 유난히 자극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후각을 자극하는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그 냄새는 주인공 동호가 그때, 그곳에서, 친구 정대를 찾으며 견뎌내야 했던 냄새였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도 모르게 코(그렇다 코다)를 찌푸리기도 했고요. 글에서 냄새가 자꾸 배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어쩌면 시체 썩는 냄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한 번도 맡아본 적은 없어요). 총에 맞은, 혹은 칼에 찔린 시체들의 냄새가 났습니다.”


솔직히 책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책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였다. 읽는 도중에 그냥 책을 덮든가, 속도를 내든가.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순식간에 읽었다. 아래의 대목에 밑줄을 그으며.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 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p57).”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p117).” 




◇시신 수습하던 15세 소년에 비친 비극


<소년이 온다>는 한강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5.18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돕는다. 매일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열다섯 어린 소년은 '어린 새' 한 마리가 빠져나간 것 같은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시취를 뿜어내는 것으로 또 다른 시위를 하는 것 같은’ 시신들 사이에서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5.18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광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사람들의 삶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은 끔찍한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치욕스러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책이 출간된 2014년, <소년이 온다>는 가장 주목받는 소설이었다. 5.18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책을 지배하는 '핏빛 냄새'와 고통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책이 지닌 문학적 힘 덕분이다.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고통스럽고 잔인했던 역사의 순간을,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낸 소설은 흔치 않다. '역사'를 과감히 빼더라도(그게 가능하다면) 미학적인 측면만으로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이런 극찬은 전혀 거북하지 않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중략)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책은 이렇게 묻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여전히 이러한 질문은 유효하다. 다른 비극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월호에서 그것을 다시 목격했다. 


동명의 웹툰을 영화화 한 <26년>의 한 장면. 


다시, 어김없이, 5.18이다. 허지웅의 말처럼 “빤히 벌어진 죽음의 초상들이 알량한 이해관계에 의해 영 다른 기억으로 왜곡되고 지워지는 지금 이 시간에, 그나마 광주를 기억해보려 애쓰는 모든 이야기들이 고맙고 귀하다.” 소설 <소년이 온다>도 그랬다.


끝으로 공지영의 말을 상기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벼이 여기던 나날이여, 저주받으라.”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소설가 한강은 16일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다.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에 대한 내 끝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완성하려고 했다. 가능한한 그 질문 속에 있으려 했다. 그것은 종종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최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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