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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16. 2016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데몰리션>, 상실을 견디고 극복하는 어떤 방법


사랑에 관한 영화는 두 가지다. 내 얘기거나, 내 얘기가 아니거나. 재개봉한 <500일의 썸머>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며 누구나 내 얘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얘기라는 착각 불러일으키기, 그것이 사랑을 소재로 한 좋은 영화의 첫 번째 힘이다.


흔한 사랑 얘기를 풀어놓는다고 해서 꼭 내 얘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누구나 사랑을 경험한다. 이별도 한다. 이별은 슬프고, 슬프니까 무조건 운다. 그 슬픔을 배우들의 (우는) 연기로만 승부하려는 영화들이 있다. 스토리나 내러티브는 뒷전이다. 이런 영화를 내 얘기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진부한 얘기지만 진부하게 말하지 않기, 사랑을 소재로 한 좋은 영화의 두 번째 힘이다.


영화 <데몰리션>의 사랑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


◇사랑, 그리고 상실에 관한 이야기


<데몰리션. Demolition>은 사랑 영화다. 그리고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 만들었고, 좋은 영화다. 내 얘기 같은데 처음 겪는 감정선을 경험할 수 있다. 진부한 얘기지만 진부하지 않은 얘기로 끌어가는 연출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슬픔'을 '눈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출근길, 아내는 남편의 무심함을 나무란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일상으로 보인다. 남편은 멋쩍게 웃어넘긴다. 아내도 화가 나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순간, 교통사고가 난다. 남편은 살고 아내는 죽는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부족한 것 없는 생활, 평범한 일상에서 갑자가 아내를 상실한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가 겪는 고통과 고독, 상실감이 그려진다.


데이비스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과연 내가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가 죽었는데도 배가 고파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사야 하고, 아내와 함께 잠들었던 침대에 누워 자고, 아침이면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 출근을 한다. 변한 것은 없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없다. 데이비스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간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


정말 그랬을까? 너무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우리가 쉽게 그것을 잊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그것이 나한테 그렇게 소중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그 사람을 가장 손쉽게 잊는 방법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물건들, 공간들, 기억들. 때로는 함께 했던 시간들까지. 늘 실패하지만, 그렇게 한다.   


아내를 잃은 데이비스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자책한다.


데이비스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구입한 커피머신을 해체하고, 사무실의 컴퓨터를 분해하고, 심지어 집까지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심지어 관객조차) 고통스럽다. 유일하게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캐런(나오미 왓츠)뿐이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파괴(데몰리션)' 중이니까.


그 파괴는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파괴할 권리가 없다. 사랑은 '규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규정한다고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파괴할 수 없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파괴는 늘 실패로 끝난다. 어떤 상실의 고통이 엄습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데이비스는 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몇 개뿐이다. 해변을 걷는 아내, 소파에 누워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 시선 정도가 전부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영수증이 아니다. 오히려 뜨거웠던 순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들어온 아내의 존재를 확인하는 내용증명이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데이비스는 급기야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아내의 죽음과 부재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데이비스는 깨닫는다. 아내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파괴를 멈춘다. 상실의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인정'과 '수용'으로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힘겹지만, 데이비스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데이비스보다 더 파괴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상실을 견뎌내려 했던 캐런과 그녀의 아들도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위로와 위안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도 경험했으니까. 이렇게 일상을 견뎌내는 것, 소중했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데이비스의 얘기를 들어주는 캐런도 사실은 더 큰 상처와 상실감을 안고 살고 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슬픔과 상실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영화 <그래비티>에서는 라이언 스톤(샌드라 블록)이 사고로 죽은 딸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고 전화를 운전 중에 받았어요. 그 후론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그리고 그냥 운전했어요." 


소설가 김중혁은 에세이집 <바디 무빙>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운전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무가 없는 어떤 날은 딸을 생각하며 하루 종일 걸었을지도 모른다. (...) 생각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어서, 자책을 그만두고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어서 몇 시간 동안 달렸을지도 모른다. 러닝머신에서 달리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미끄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데몰리션>의 데이브스와 <그래비티>의 라이온 스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한 가지 깨달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데몰리션>은 사랑과 상실, 상처에 관한 영화다. 한 남자의 극복기다. 힘겹게,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상처를 이겨내고 상처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나처럼 많은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데이비스는 모든 흔적을 지우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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