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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03. 2017

다 갖지 못해도 괜찮아

<라라랜드>에 우리는 왜 열광하는가

※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적어도 한 편의 영화는 있었다. 1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오느라 미처 뒤돌아보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고, 실수도 잦았지만 그래도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영화. 누구나 그렇다. 한 해가 저물 때쯤이면(혹은 시작될 때쯤이면)     려오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위로를 받고 싶다. 복되는 송년회로도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식상한 인사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연말·연초에 만나는 따뜻한 위로의 영화는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된다. 2012년 레미제라블, 2013년 변호인, 2014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2015년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던 것 같다.


지난해 말 <라라랜드(La La Land)>가 개봉했을 무렵, 그것이 ‘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인지도 모르고 영화관으로 다. 뮤지컬 영화는 밑져야 본전,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티켓 값은 뽑는다는  평소의 신조지라 주저 없이 표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2016년 ‘올해의 영화’로 기억할만한 영화가 없었다. 연초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을 시작으로 스포트라이트, 대니쉬 걸 이후 본 영화는 내내 숨이 찼다. 한국 영화는 특히 그랬다. 내부자들, 곡성, 부산행, 아수라, 판도라, 그리고 최근의 마스터까지. 더구나 10월 이후 우리는 정말 ‘상상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생생히 목격해야 했다. 참가하든, 구경하든, 욕을 하든, 예외 없이 우리는 광장에 있었다.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


그래서 어쩌면 <라라랜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지쳤고, 피곤했으므로. 그렇게 본 영화는 그냥 좋았다.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가 다시 조우하는 크리스마스 무렵의 어느 레스토랑, 세바스찬이 자신의 피아노곡을 연주할 때부터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나는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 말했다. 사랑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 사람만 보이는 거라고. 그렇다. 언젠가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도 본 적이 있다. 그녀가 내 차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그 장면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뇌에 새겨져 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달려오는 그녀의 머리 위로 환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레스토랑 안 누구도 세바스찬의 피아노 연주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미아는 세바스찬의 연주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다. 우리는 직감한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임을.  


◇결국, 사랑은 시작이자 끝이 아니라 과정


만나고, 사랑하고, 다투고(갈등하고), 헤어진다. 이 식상한 레퍼토리는 인류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만든 이후부터 불변의 공식이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문학은 셰익스피어의 오마주이자 변주일 뿐이라고. 더 이상 다룰 이야기가 없다는 의미다. <라라랜드> 역시 스토리만 따지고 보면 그 식상한 레퍼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결국 과정이다. 그 과정은 모든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천만 명의 러브 스토리에는 천만 개의 사연이 숨어있다. <라라랜드>에서 남녀 주인공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LA의 야경을 무대로 춤추고 노래한다. 그것이 그들의 러브 스토리이자 사랑의 과정이다. 그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리라.


포스터에 등장하는 영화속 이 장면은 꽤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무엇보다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상상 속 장면을 보는 내내 불안했다. 그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손뼉을 치고 싶었다. 수십 번의 오디션에 낙방한 끝에 빛나는 별(스타)이 되고, 숱한 모욕과 좌절을 겪은 끝에 자신의 재즈 바를 갖게 됐지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끝내 갖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영화는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했지 않느냐고, 그 힘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견뎌내지 않았느냐고.

 

작년에 그랬듯 올해도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뜻한 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가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잊지 못할 순간을 또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매 순간의 합(合)이다. 다 갖지 못해도, 다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면 됐다고.

 



추 :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언젠가 보았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 <이런 詩>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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