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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11. 2017

"이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말하는 관심과 연대  



마지막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향한 곳은 고용센터였다. 처음 실업급여라는 것을 받으러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곳에서 나는 '나'를 증명해야 했다. 현재 고정 수입이 없고, 어떻게 내 의지와 관계없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으며, 앞으로 구직활동을 어떻게 하겠다는 사실을. 물론 교육도 받아야 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것은 "나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하는 비참함"이었다.    

   

그나마 나는 형편이 나았다. 실업급여라도 받았으니.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의 대표는 늘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 사람을 키우는 회사”를 강조했지만, 그런 회사가 대게 그렇듯 정작 직원들은 오래 다니지 못했다. 경력직으로 그 회사에 입사해 팀장을 단 직후 내가 받은 첫 오더는 “000 잘라라”였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원들이 그렇게 수없이 잘려나갔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잘린(혹은 잘리다시피 회사를 나간) 직원 누구도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회사는 해고자나 권고 퇴사자가 없다. ‘자발적 퇴사자’만 있을 뿐이다. 


나이 들고 병든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사회보장 제도는 결코 친절하거나 따뜻하지 않다. 


아직도 이런 일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외침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공감과 거리감의 경계에서 서성였다. 환갑이 다 된 노인조차 관계 당국을 찾아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시도(성패와 관계없이)가 자연스러운 나라. 반면 20~30대 청년들이 사장의 말 한마디에 어떤 권리도 찾지 못하고 실업자로 내몰리는 나라를 과연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만약 다니엘 블레이크가 영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살았다면 어떤 비참한 상황과 마주했을까?


영화는 영국의 하층민을 엄습한 신자유주의의 폭력과 민영화의 횡포, 제도의 모순, 그 뒤에 가려진 대처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한다. 어느 날 몸이 아파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은 질병수당과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를 방해하는 것은 노골적인 폭력이 아니다. 절차의 복잡성, 수단(인터넷이나 ARS와 같은)의 비효율성이 그를 가로막는다. 


장벽은 생각보다 높고 견고하다. 물론 내가 다녔던 그 회사처럼 직원들을 함부로 자르면서도 해고나 권고사직으로 해줄 수 없다는 무식함과 천박함은 없다. 하지만 60세를 코앞에 둔 다니엘에게 그 견고한 벽은 날카로운 가시가 솟은 철조망과 같다. 다니엘은 점차 실의와 절망에 빠진다. 구겨진 자존심은 둘째 치더라도 당장 집에서 나와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다. 병들어 일하지 못하는 사람을, 실직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는 비교적 촘촘하지만, 그 제도는 결코 친절하거나 따뜻하지 않다. 


다니엘은 자신보다 더 비참한 이웃에게 말한다. "이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왜 그때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친절하고 따뜻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그런 상황에서도 가난한 싱글맘 케이티의 가족을 돕는다. 케이티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생필품 지원센터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먹다 흐느낄 때 다니엘은 어깨를 다독인다.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다니엘이 절망에 빠지자 이번엔 케이티의 가족이 손을 내민다.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다니엘의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도와주셨잖아요. 저도 돕고 싶어요.” 다니엘에게 매일 잔소리를 들었던 이웃 흑인 청년도 다니엘의 인터넷 서류 접수를 도우며 이렇게 말한다. “뭐든 도와드릴 테니 말만 하세요.”


이 영화가 거장 켄 로치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든지, 201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든지 하는 찬사는 잠시 잊자.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에둘러 가지 않고 말하려는 주제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라는 다니엘의 외침(?)에 귀 기울여보자.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회사를 떠난(쫓겨난) 후배들이 떠올랐다. 나는 왜 그들에게 왜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을까?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관심이나 배려, 연대와 같은 단어의 실체를 오랜만에 목격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권한다. 재미는 장담 못한다. 하지만 멍한 충격과 먹먹한 감동은 장담한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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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앞에서 말한 그 회사는 골치 아팠던 직원들을 모두 정리한 그해,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사랑받는 기업' 포상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직원을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말을 내세우는 회사를 절대 믿지 않는다. 


다니엘이 온정을 베푼 이웃이 이제는 다니엘을 돕겠다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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