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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16. 2017

그의 소설은 복수일까 사랑일까

치유와 극복의 글쓰기, <녹터널 애니멀스>



“언젠가 꼭 소설을 쓸 거야. 내용은 참혹한 복수극이고, 결론은 당연히 비극이 되겠지.” 누구라고는 말 못하지만, 정말 이런 멘트를 던졌다는 사람을 알고 있다. 유치하게 들리지만, 그는 연인으로부터 작별을 통보받는 순간, 정말 살의(殺意)를 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살의를 문학적 열정(?)으로 승화시켰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면서 그런 ‘소설 같은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주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유하모든  이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수잔(에이미 아담스)은 어느 날 헤어진 옛 연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 보낸 소포를 받는다. 내용물은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라는 제목이 붙은 출간되기 전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는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붙여줬던 별명이기도 하다. 수잔이 소설 으면영화는 시작된다.      


어느날 수잔은 옛 연인으로부터 소설을 받는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


영화는 3중 구도로 진행된다. 현재, 과거, 그리고 소설 속 이야기. 영화든 소설이든 ‘액자식 구조’의 관건은 내러티브에 달려 있다. 한 부분 어긋 전체가 무너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일단 형식적으로 성공을 거둔 듯하다. 현실과 소설의 이야기, 현재와 과거의 사건이 중첩되지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소설 속 이야기의 팽팽한 긴장감이 현실로 전달되고,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처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진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소설은 연애소설이 아니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연인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범죄물에 가깝다. 소설은 참혹한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한 남자의 고통과 복수. 수잔은 책을 온전히 읽지 못한다. 잔혹한 장면에서는 눈을 감기도 하고 책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에드워드와의 행복했던 순간,  불행했던 장면을 떠올린다.      


소설의 스토리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할수록 수잔은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영화는 현실도 조만간 파국으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수잔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복수라면, 에드워드의 목적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을 수잔에게 보낸 것은 과연 복수를 위해서였을까? 수잔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목표였을까?


충격적인 에드워드의 소설을 읽으며 수잔은 혼란에 빠진다. 과거를 떠올리고 불안한 현실은 그녀를 옥죈다.

    

◇“불안을 떠안고 실패를 감수할 것”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또 소설가, 좋은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에드워드는 착한 남자였다. 예전 그의 글도 착했다(그저 그랬다). 그의 글의 힘과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잔의 이별 통보였다. ‘뻔한’ 문장이 달라진 것이다. 소설  수잔은 용기를 내 에드워드에게 메일을 보낸다.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에드워드의 소설이 복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떠난 사람을 위한 ‘연서(戀書)’였을 것이다. 고통과 배신감을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한 문장 한 문장 고쳐 완성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리하여 화에서 글쓰기는, 소설은, 치유와 극복의 마침표가 된다. 소설을 보낸 것은 20년 가까이 수잔을 잊지 못한 에드워드가 그녀를 떠나보내는 일종의 씻김굿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언젠가 꼭 참혹한 복수극을 소설로 써서 복수하겠다고 말했다는 그 사람. 여전히 복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바쁘단다. 핑계가 옹색하다. 시간이 흘렀고, 복수심은 고사하고 추억마저 무뎌진 게다. 역시 최고의 복수는 깨끗하게 잊어주는 것. 그런 면에서 그 사람은 제대로 복수한 것이다.  소설은 쓰지 못했.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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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가 쓴 소설은 과연 복수였을까, 사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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