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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Mar 05. 2017

왜 존재하고 사랑하고 죽는가

인간과 세계를 향한 31가지 큰 질문 <김대식의 빅퀘스천> ㅣ 과학서평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영화 <라쇼몽>을 최근에야 봤다. 취미가 뭐냐는 고전적인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영화감상’이라고 답했다. 화제작, 개봉작을 꼼꼼히 챙겨보니 씨네필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고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던 터.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그런데도 이제야 봤다) 그 영화를 이제야 봤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나.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날 숲이 우거진 산속을 지나던 사무라이가 산적에게 살해되고 아내는 겁탈당한다. 용의자도 분명하고 목격자까지 있으니 사건 해결은 시간문제. 하지만 관청에 끌려온 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정당한 결투였다고 주장하는 산적, 남편이 두려워 자기가 죽였다는 아내, 사무라이의 자살이었다고 결론짓는 무당, 결투는 맞는데 엉성한 몸싸움에 불과했다는 목격자 나무꾼. 영화는 묻는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과연 진실이 있기나 한가?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 


◇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진실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이것을 ‘라쇼몽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탄핵 사유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수많은 헌법 위반과 범법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여전히 ‘대통령처럼 깨끗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은 섬뜩하다 못해 애처롭다. 그것이 사실이냐 진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 그게 곧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도 이런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에게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어떤 이는 평생을 바쳤다.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는 진실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역사, 사회, 경제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 간의 권력구조가 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영원불변의 수학적 진실을 꿈꿨다. 러셀은 같은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화이트헤드와 함께 20년의 세월을 바쳐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한다. ‘1+1=2’라는 간단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무려 362장을 할애했다고 하니 수학적 진실을 향한 그의 집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레드릭 하트의 조각. 책의 첫 질문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이다. <사진=책 본문 중>


KAIST 김대식 교수가 쓴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글자 그대로 이런 크고 중요한 질문(Big Question)의 답을 찾아 나선다. 첫 질문부터 만만치 않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저자는 존재와 무와 유를 설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이론을 끌어온다. 우주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 철학과 과학신학과 문학의 크로스오버  


여전히 어렵다. 쉬운(쉬워 보이는) 질문 하나.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그래도 어렵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우리는 왜 ‘지금’ 사랑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먼 옛날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였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해야 먹을 수 있었다.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생산하지 않고도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사랑, 욕망도 마찬가지다. 노력하지 않고도 소비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노력도, 그리움도, 실망도, 질투도 없이 사랑을 소비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일까?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질투하며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라면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저자는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질문은 계속된다.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먼 곳을 향했다. 얼음이 얼면 걸어서 대륙을 건넜고, 얼음이 풀리면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났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리움의 대상을 하늘과 우주로 확장했다. 40년 전 발사된 보이저호는 여전히 태양계 밖을 향해 비행하고 있다. 현재 지구와 보이저 1호의 거리는 약 205억km. 지구와 태양까지 거리의 138배에 달한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토록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황금, 명예, 모험심, 어느 것 하나 답을 충족하지 못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The End’라는 자막과 함께 끝나지만, 새로운 영화가 곧 시작된다. 인생도 계속된다. 아무리 먼 곳으로의 여행도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돌아올 수 없는 하나의 헤어짐이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그다음이 없는 끝이다. (중략) 존재하는 동안 끝이란 없다. 모든 ‘끝’은 또 하나의 ‘시작’ 일뿐이다. 하지만 죽음만은 다르다. 죽음은 그다음이 불가능한 끝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모험과 탐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지 모른다.”  


이런 질문이 무려 31개나 된다.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없다. 삶의 의미부터 역사와 사회, 과학과 미래를 넘나들며 질문을 던진다. 철학과 과학, 신화와 문학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답을 찾는다. 저자는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에서 ‘제국적 마인드’를 강조했다.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어감이지만, 갈수록 복잡해지고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를 그렇게 명명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와 나의 감정이 아니라 역사, 종교, 정치, 경제, 사회, 과학적인 변수를 동시에 고려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책에서 던지는 거대한 질문은 이런 ‘제국적 마인드’를 농축하고 융합한 결과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의 사람들>. 저자는 이 그림의 사람들처럼 늘 외로운 이유를 묻는다. <사진=책 본문 중에서>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몇 해 전 김대식 교수의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김대식 교수를 알지 못했다. 강의에 집중하지 않고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은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만약 다시 그의 강의를 듣게 되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참 많다. 물론 대부분 질문은 이 책에서 본 내용이겠지만. 명쾌한 답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 이 강의의 핵심”이라고 넉살 좋게 피해갈 것 같다. 


<김대식의 빅퀘스천>도 그런 책이다. 속 시원한 답은 없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눈을 뜨고 장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수천만 년 동안 태어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실망하고 사라진 우리들 모두의 조상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선문답을 내놓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137억 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서 탄생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논리적인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비논리적인 답으로 피해 간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자.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생각해 보라.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왜 필요한가 등의 질문에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가 명쾌한 답을 주겠는가. 어느 대학 교수가(그는 권력자 딸의 ‘말타기’ 지원에 가담했다가 최근 쇠고랑을 찼다) 젊은 시절 썼던 소설 제목이 더 그럴듯한 답으로 들린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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