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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pr 23. 2017

운명을 바꾼 숫자 '1.5'의 비밀

다큐멘터리  <더 플랜>을 꼭 봐야하는 이유



집에 6개의 슈퍼 100이 격일로 배달된다. 종류는 세 가지다. 딸기, 복숭아, 블루베리. 그런데 배달되는 종류의 비율이 그때그때 다르다. 어떤 날은 딸기가 세 개, 복숭아 두 개, 블루베리 한 개. 또 어떤 날은 복숭아 세 개, 블루베리 세 개가 배달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랜덤이다. 대체로 무덤덤한 편이라 1년 넘게 그냥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복숭아 다섯 개, 블루베리 한 개가 배달된 거다. 비율도 문제였지만, 좋아하는 딸기가 하나도 없다니! 즉시 다음 날 ‘항의’했고(말이 항의지 사실상 ‘아줌마, 딸기 좀 더 많이 주시면 안 돼요?’ 정도의 애원이었다), 지금은 대체로 두 개씩의 비율이 지켜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실화다. 


<더 플랜>의 한 장면. 


여기부터는 가정이다. 종류가 딸기, 복숭아 두 개라고 치자. 배달될 때마다 비율이 다르다. 어떤 날은 딸기가 2개, 또 어떤 날은 복숭아가 두 개. 제조사에서는 딱 절반씩 만든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그런데 1년 동안 매일 통계를 내보니 복숭아가 딸기보다 평균 1.5배 많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슈퍼 100을 시켜먹는 모든 집에서 그런 현상이 발생했다. 지역이나 성별, 연령대에 관계없이 복숭아가 딸기보다 평균 1.5배 많았다. 


제조사에서 정확히 딸기 반, 복숭아 반, 절반씩 만들고, 그날그날 손에 잡히는 대로 배달하는 거라면 1년 치 통계는 ‘1’이거나 1에 가깝게 나와야 한다. 우리 집은 예외로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나와야 한다. 그날그날 딸기와 복숭아의 비율이 다를 수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1:1의 근사치로 나와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1.5’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유는 단 하나다. 회사에서 그렇게 조절한 거다. 이유는 모른다. 복숭아의 원가가 딸기보다 낮거나, 회사 사장이 복숭아를 좋아하거나. 

 

<더 플랜> 포스터. 


◇'1.5'라는 숫자의 규칙을 파헤친 과학 다큐 


사족이 길었다. 김어준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더 플랜(The Plan)>은 일관된 숫자의 비밀을 파 헤진다. ‘1.5’. 내가 매일 시켜먹는 슈퍼 100과 관련된 거라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딸기를 좋아하지만, 복숭아도 먹을 만하다. ‘항의’하면 즉시 시정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숫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와 관련된 거라면? 그것도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 치열한 박빙의 경합을 겨루는 선거라면?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 나라의 운명과 일상의 삶을 좌우할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면?  


제작자 김어준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허탈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오는 걸, 4년 넘게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 너무 해탈했다.” 다큐멘터리를 본 관객도 그렇다. 허탈하다. 그것은 분노와는 또 다른 문제다. 화나고 열 받고 속았다는 생각을 넘어 ‘정말 이렇게 간단하게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너무 허탈했다.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뭘 한 거지? 지난겨울 촛불을 들고 나섰던 우리는 무엇을 한 거지?  


<더 플랜>은 음모론을 다룬 다큐가 아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에서 나온 ‘1.5’라는 숫자의 비밀을 파헤친 일종의 ‘과학 다큐’다. 제작자 스스로 밝혔듯 가정으로 끝나는 사실, 의혹으로 끝나는 사실은 일체 다루지 않았다. 오로지 숫자와 통계로서 입증된 가설, 증명된 주장만 다룬다. 가설이나 이론을 실험으로 입증하는 과정을 우리는 ‘과학’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더 플랜>은 과학 다큐다. 


<더 플랜>의 한 장면.


◇"투표가 아니라 개표가 결정한다"


영화에서 추적하는 1.5라는 숫자는 개표 과정에서 전자개표기가 자동으로 ‘미분류’로 분류한  투표지의 기호 1번(박근혜)과 기호 2번(문재인)의 비율이다. 제작자들은 우선 미분류 투표용지가 너무 많다는 사실에(3%가 넘었다) 주목했다. 다음으로 이 미분류 투표용지 가운데 박근혜를 찍은 표가 너무 많다는 점에 물음표를 던진다. 일관된 규칙성을 찾기 위해 권위 있는 통계학자, 컴퓨터 공학자 등에게 이 숫자를 건넨다. 그리고 그들은 찾아낸다. 모든 숫자는 ‘1.5’로 모아진다. 


다시 말하지만 <더 플랜>은 숫자의 비밀(규칙성과 그 숫자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찾아가는 과학 다큐다. 그냥 과학 다큐가 아니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과학 다큐다. 100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유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거다. 지루하지 않다. 그래서 꼭 이 영화를 통해 엄청난 어떤 교훈이나 새로운 사실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냥 ‘재미’로 보라고 감히 권한다.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좋을 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솔직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씨파, 투표하면 뭐해!” 간단한 프로그램 조작(혹은 해킹)으로도 원하는, 주어진 입력 값 대로 투표지가 분류되는 전자개표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선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제작진이 그토록 선거일 전에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서두른 이유가 있지 않겠나.  


다큐멘터리 <더 플랜>의 한 장면.  


영화에서는 그렇다고 부정 개표로 당선자가 바뀌었다거나, 부정 개표로 득표율 차이가 바뀌었다거나 등의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간단한 조작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도 주장이나 음모론이나 '썰'이 아니라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통계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처럼 나름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만큼 이 영화의 주장을 뒤집기도 너무 쉽다. 이 다큐에서의 논리적 근거와 실험 결과가 잘못됐다는 근거만 제시하면 된다. 여전히 "음모론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음모다. 


재미있게 봤다. 재기 발랄한 가설과 실험과 입증, 그리고 쫄지 않은 김어준과 제작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영화 보고 허탈하더라도, 공포스럽더라도, 쫄지 말고 꼭 투표하자. 투표하기 전에 <더 플랜>을 보면 더 좋고.  


by 책방아저씨


<더 플랜> 풀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GGikPMNn2w      

최진성 감독(왼쪽)과 제작자 김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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