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와 심장으로 보는 영화 <덩케르크>
영화를 보러 가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과장이나 괜한 수사가 아닙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는 티켓을 끊고 영화관 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늘 가슴이 두근거리지요.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그랬고, <인터스텔라>가 그랬으며, 이번 <덩케르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곡가 한스 짐머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스텔라>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입니다. 첫 장면에서 정체 모를 드론이 날고 그것을 쫓아가는 장면, 우주선 인듀어런스호가 도킹하는 장면, 그리고 피아노 건반을 닮은 4차원 공간에서 쿠퍼가 딸 머피에게 신호를 주는 장면에서 나오는 선율을 말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때 흐른 음악이 기억나고, 그 음악을 들으면 그때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한스 짐머가 작곡한 배경음악입니다.
또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입니다. 극적인 장면마다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악당 벤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어둡고 장중한 타악기 중심의 OST '벤의 테마'를 말입니다. <다크 나이트> OST CST 첫 번째 트랙인 '조커의 테마'에서는 바이올린 줄을 커터칼 같은 것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지고 몽환적인 선율이 흐릅니다. 실제 그런 과정을 거쳐 음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놀란 감독 대부분 영화의 OST를 제작한 작곡가 한스 짐머의 음악은 타악기와 현악기, 그리고 피아노까지 어우러져 심장 박동 소리를 연상시킵니다. <인셉션>에서 계속 저음으로 깔리는 배경음악은 '마치 꿈에서 음악을 들으면 저렇게 들리겠구나'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보기 전, 보는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
<덩케르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계 초침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듯한 포성, 함성, 총성, 비행기 엔진 소리 등이 뒤섞인 듯한 OST는 영화의 긴장감을 더합니다. 음악이 빨라질수록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지요. 영화 보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영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고 착각할 정도였으니까요. 과장이 아닙니다.
그 사이로 튀어나오는 실제 총격 소리, 폭발 소리, 전투기 소리가 스크린에서 나와(마치 그렇게 느껴진다) 좌석을 타고 몸으로 전해지면 어느새 내가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한스 짐머의 음악이 없는 놀란 감독의 영화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영화 장면을 생각하며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음악을 생각하며 놀란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듭니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은 영화를 보면서 더욱 빨라집니다. 최고조에 달할 때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보고 나와도 소리가 귀에 남아 심장을 계속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스 짐머의 OST를 듣고 있습니다. 영화 속 장면이 자꾸 떠오르네요. 놀란 감독의 작품은 그렇게 눈으로, 귀로, 심장으로 보게 되는 영화입니다.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 언론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지요. “영화 스토리는 감정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음악은 냉철함과 객관성을 가지고 가길 바랐다. 영화 스토리에서는 감정적인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음악 자체의 차가움이 두 사이의 시너지를 잘 발휘한 것 같다.”
또 놀란 감독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도 있는데 그 소리를 녹음해서 영화에 반영했다. 소리와 배우의 연기, 광경이 모두 합쳐져서 영화적인 표현을 할 수 있었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그가 영화의 극적인 표현을 위해 음악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물론 감독의 그런 주문을 한스 짐머가 정확히 포착한 결과입니다. 놀란 감독만 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관객까지 대만족입니다.
◇세 개의 공간, 세 개의 시간으로 극적 긴장 고조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등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 놀란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충분히 발휘합니다. 영화는 크게 육지(해변)와 바다, 하늘이라는 세 개의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 공간의 시간도 일주일, 하루, 한 시간으로 다르게 설정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면서 관객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지요. 물론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덩케르크>는 분명 전쟁 영화입니다. 하지만 탈출을 감행하는 ‘아군(영국과 프랑스군)’만 등장합니다. 이들을 쫓고 공격하는 ‘적군(독일군)’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탈출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독일 전투기만 등장할 뿐입니다. 철모를 쓰고 총을 든 독일군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딱 한 번 실루엣처럼 나옵니다. 이것 역시 오히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긴박한 순간을 배가하고 공포심을 높이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영화는 전투에서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라, 잘 도망치는(탈출하는) 것도 승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겁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도망쳤다는 부끄러움과 열패감에 빠진 병사에게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왔으니 그걸로 된 거야.”
실제 ‘다이나모(Dynama)’라고 명명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애초 3만 명을 목표로 했지만, 30만 명이 넘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탈출에 성공합니다. 역사가들은 당시 히틀러가 사흘 동안 머뭇거리지 않고, 총공세에 나섰다면 영국은 만회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런 독일군의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사족이니까요.
◇차갑고 냉정하게 던지는 감동
<덩케르크>에서는 전쟁의 긴장과 공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동의 장면과 대사를 무심한 듯 툭툭 던집니다. 결코 오버하지 않고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놀란 감독은 마치 조커나 벤과 같은 '역대급' 악당 캐릭터를 만들 듯 냉혹하고 차갑게 감동의 포인트를 만들어냅니다. 그조차 오래 보여주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신파에 젖어들면 안 되니까요. 놀란 감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탈출하는 병사들을 싣기 위해 조각배들이 바다 위를 달려오는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연료가 바닥났는데도 탈출을 방해하는 적군의 비행기를 격추시킨 후 스핏 파이어 전투기가 활강하는 장면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 많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 더 봐야겠다. 이번엔 아이맥스로.”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by 책방아저씨
P.S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해 화제가 됐던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을 영화로 만들면 어떤 영화가 탄생할까 상상해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국뽕 영화'처럼은 만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