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아저씨 Aug 21. 2017

여행의 목적

영화 <파리로 가는 길>과 사랑 혹은 여행, 그리고 삶



'목적지도 없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 그런 여행을 한 적 있을까? 잘 모르겠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야 생각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행에는 늘 목적지가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목적지도 없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 그것을 우리는 ‘방황’이라고 치부했다. 너무 쉽게.  


자크(아르노 비야르)는 앤(다이안 레인)에게 말한다. “목적지도,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납시다." 처음에는 앤을 안심시키기 위로의 말인 줄 알았다. 남편(알렉 볼드윈)과 떨어져 낯선 프랑스 남자와 칸에서 파리까지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 앤에게 “반드시 힘든 여정만은 아닐 것”이라는 위로의 말.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 목적지도 없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길에 만난 자크의 옛 연인은 앤에게 이렇게 귀띔한다. “자크는 당신에게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의 추억을 선물할 거예요.”  


영화 속 장면과 세잔의 그림 '생 빅투아르 산'. 
영화 속 장면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세 개의 그림과 세 개의 장면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이틀간의 여행이 시작된다.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은 당연히 풍경이다. 칸에서 파리로 가는 길.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그림이다. 그리고 실제 세 개의 그림이 등장한다. 영화 속 장면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영화 속 장면으로 되살아난다.  


첫 번째 그림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자크와 앤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고향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은 마을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한다. 그때 자크가 저 멀리 보이는 이 산과 세잔을 설명한다.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무려 60번 넘게 그렸다.  


두 번째 그림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자크는 자동차가 고장 나자 앤을 강가의 풀밭으로 데려간다. 지난밤 묵었던 호텔에서 가져온 간단한 빵과 치즈, 그리고 와인을 내놓는다. 언제 파리에 도착할지 걱정하는 앤에게 자크는 말한다. “파리는 어디로 도망가지 않아요.” 고장 난 차를 어찌할지 걱정하는 앤에게 자크는 또 말한다. “차는 어디로 도망가지 않아요.” 그들은 그림처럼 풀밭 위에서 점심 식사를 즐긴다.  


세 번째 그림은 르누아르의 ‘부지말의 무도회’. 식사를 하던 식당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자크는 앤에게 춤을 추자고 한다. 그리고 춤을 춘다. ‘부지말의 무도회’의 그림을 보면 카페가 차려진 숲 속에서 남녀가 춤을 추고 있다. 꽃으로 장식한 빨간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은 남자의 시선을 외면한다. 싫은지 좋은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그림처럼 자크와 앤은 춤을 춘다.


영화 속 장면과 르누아르의 '부지말의 무도회'. 


풍경만큼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음식과 와인이다. 자크는 수시로 앤을 식당으로 안내한다. 그 지방의 특산물로 만든 최고의 코스 요리를 주문한다. 그리고 와인을 주문한다. 보는 내내 입맛을 다시다가 마지막 식사에서 ‘쇼콜라’가 디저트로 나오는 장면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속으로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맛있을까?  


그 감탄과 질문은 ‘얼마나 행복할까?’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감독은 말한다. 사랑은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여행과 같다고. 여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음식과 같다고. 감독은 한 발 더 나간다. ‘사랑’ 대신 ‘삶’을 넣어보라고 말한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완성된 문장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여행이다.”  


◇목적지도 없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  


영화를 보며 계속 기억하려 애썼다. 저런 여행을 해본 적 있던가. 저런 사랑을 해본 적 있던가. 저런 삶을 산 적이 있던가. 앤은 20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을 단 이틀 동안 완성했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의 마지막, 앤의 미소가 그것을 말해준다. 물론 열린 결말이니,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영화는 음식과 와인과 앤의 사진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앤은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뭐든 찍는다. 사물과 대상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찍는 사진. 찰리 채플린은 “롱샷으로 보면 희극,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라고 말했다지만, 앤은 “롱샷은 부분, 클로즈업은 전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카메라 앵글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사랑과 여행은 저렇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거부할 수 없는 현재에 불만을 토로하며,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사는 우리에게 영화는 이렇게 유혹한다. “목적지도 없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자”라고. 그럴 수 있을까?  


by 책방아저씨 


p.s :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영화의 감독 엘레노어 코폴라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부인이라는 걸 알았다. 부부가 함께 출장길을 떠나 실제 겪었던 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다이안 레인의 주름진 연기가 영화 내내 반짝반짝 빛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