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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13. 2015

그녀의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침대와 책>에서 말하는 침대와 책의 공통점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에서 여인이 읽고 있는 것은 책일까 편지일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한 일이 ‘읽는다’는 사실이다. 샤워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니고, 옷을 갈아입은 것(그냥 벗기만 했다)도 아니고, 호텔방에 그녀가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읽는 일’이었다. 부끄럽지만 이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통해서다. 그녀는 서문에서 이 그림을 이렇게 소개했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 중인 듯 침대 옆에서 가방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 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춤한 책 한 권을 읽는 것이었다.”


그녀는 틀렸다. 자세히 보면 책은 아니다. 그것도 두툼하지 않다. 그녀의 맨살 무릎은 얇은 종이 한 장 밑으로 드러나 있다(확대해보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변태 아니냐고 오해 마시길). 편지에 가깝다. 정혜윤은 책으로 봤고, 그녀의 글 때문에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책 읽는 여인을 떠올린다. 책이 있는 숱한 그림 중에 가장 ‘관능적인 그림’으로 기억한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다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내가 아는 한 가장 관능적인 제목의 책이다. 그렇다고 관능적인 내용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크다. 책은 관능적이라기보다 ‘감각적(모든 관능은 감각적이지만, 감각이 모두 관능적인 것은 아니다)’이다. 그녀는 침대와 책의 공통점을 이렇게 말한다. 


1. 한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나기 어렵다.

2.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지배한다. 

3.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침대에는 게으른 육신들이.

4. 특별한 사람에게만 빌려주고 싶다. 

5. 화려한 커버를 두르고 있더라도 진가는 내용에서 빛난다.

6. 전시장에서는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7. 같이 있다 보면 신체의 변형을 가져온다.

8. 때론 잠을 부르고, 때론 잠을 쫓는다. 

9. 결코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긴다. 

10. 필요에 따라 접기도 하고 펴기도 한다. 


2008년 7월에 이 책을 구입하고 읽은 것으로 적혀 있다(도대체 2008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때였나? 이런저런 ‘독서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가 대신 읽은 책을 내가 읽은 책처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기는 늘 매력적이다. 이 무렵 그녀의 책을 만났다. 

 

이 책은 독서일기다. 저자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고 감상을 적은 글이다. 이 책이 다른 독서기와 다른 것은 자신이 겪은 상황, 순간, 감정에 맞는 책들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울한 다음 날 술 한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코스모스>와 <우울한 열정>, <브루클린 풍자극>을 읽는다. ‘내 옆의 남자들이 매력 없고 한심해 보이면’ <개선문>이나 <빅 피시>, <장미의 이름>, <책 읽어주는 남자> 등이 제격이다.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닥터 지바고>, <브로큰백 마운틴>, <농담>을 추천한다. ‘오늘은 내 꼴이 추레하고 처량하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는다. 


그렇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녀의 말처럼 ‘사랑이 끝나는 걸 아는 순간’ <설국>이나 <첫사랑>,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는다고 사랑이 돌아올 리 없다. 또 그 책을 읽는다고 그(녀)를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다. ‘꿈은 있지만 꿈에 이르는 길을 몰라 불안할 때’ <고독한 글쓰기>와 <주홍글씨>, <모비 딕>을 읽는다고 어찌 마음의 평화를 얻겠는가. 


힌트는 얻었던 것 같다. 아니 할 일을 찾았다. 우울한 다음 날 술 한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랑이 끝나버린 걸 알아버린 순간, 꿈은 있지만 꿈에 이르는 길을 몰라 불안해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녀의 사적인, 혹은 은밀한 독서기

<삶을 바꾸는 책읽기> 표지의 정혜윤. 

언젠가 알았던 지인은 속상한 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무조건 잠을 잔다고 했다. 해결되지도 않을 일을 붙잡고 씨름하고 고민하고 다투기보다는 잠을 자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때는 퍽 이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나름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일은 ‘그 순간의 상황’이 만들어낸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요하고 절실하고 다급해 보이는 일이라도 그 순간만 지나면 별 일 아닐 수도 있다(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다. 특히 연인이나 친한 사람과의 언쟁, 다툼 따위는 특히 그렇다). 


잠 대신 책도 괜찮을 것 같다(책을 읽다가 잠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당장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무엇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답도 없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자꾸 시간은 흐른다. 그러면 잠시 모든 일을 접고 읽던 책을 꺼내 몇 페이지를 읽는다(물론 회사라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은 흐르겠지만 의외로 해결책이 찾아지기도 한다. 생각지도 않은 누군가가 도와주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너무 우연과 행운을 바라는 것 아니냐고? 그럼 해결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 문제를 계속 붙잡고 계시라. 


◆수만 가지 스토리가 윙크를 하고 힌트를 준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표지 사진.

정혜윤은 그런 방법을 알고 있었으리라. 또 괜찮은 효과도 봤고, 그 재미에 빠져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침대’에서 뒹굴며 책을 읽었으리라. 시사다큐 전문 PD였던 그녀는 침대에서 읽은 책의 힘으로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행복한 책읽기>와 같은 프로를 만들고 진행했으리라.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모든 책은 이렇게 읽힌다.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전 세대, 전 지역의 현자가 수만 가지 스토리를 동원해 윙크를 하며 내게 인생의 힌트를 주는 것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도망치기로서의 책 읽기를 하자는 거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책 읽기는 도망치기다. 도망치기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토록 바쁜 일들을 앞에 두고 책을 읽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도망치려야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책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어디로 도망치라는 말인가.  

그리고 여기 비교적 오래전 나온 <침대와 책>이라는 책이 있다. 슬프고 괴로운 일로, 혹은 아무 일도 없는데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 때면 이 책을 들고 침대로 향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잠들어도 좋다(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길든 짧든, 멀든 가깝든 어디론가 잠시 여행을 계획하는데 딱 한 권의 책을 넣을 수 있는 트렁크 공간이 있다면 이 책을 넣으라고 감히 권한다. 


숙소에 도착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훌훌 겉옷을 벗어부치고, 잠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이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림이 따로 없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침대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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