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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23. 2015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내가 사랑한 글쟁이 8. 김 훈

몇 해 전 김훈의 금연記를 신문에서 읽었다. 하루 세 갑을 피웠다니 담배 끊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기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렇다. 

2008년 고창 선운사를 찾은 김훈은 담배를 피우다가 노승에게 혼난다. "스님은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있으십니까. 끊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라고 김훈이 변명하자 노승은 이렇게 꾸짖는다. "그냥 안 피우면 되는 거지!" 


김훈은 그 얘기를 듣고 담배를 끊는다. 대단한 비법을 기대했건만 결론은 허망하다. 하기야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냥 안 피우면 된다’는 노승의 가르침이나 그 짧은 가르침에 담배를 끊은 김훈의 깨우침이나 막상막하다. 이 방법을 늘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지만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대신 들은 풍월은 있는지라 금연에 도전하는 지인이 있으면 늘 폼 잡고 말한다. "뭐가 그리 복잡해. 그냥 안 피우면 되는 거지!"  


오랫동안 미뤘다. 나름 내 인생에 영향을 준 글쟁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느덧 여덟 번째다. 순서로 치면 첫 번째나 두 번째에 언급했어야 할 김훈이다(순서가 곧 순위를 말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미친 사람…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김훈의 글과 문장에 대해서는 박웅현이 이미 <책은 도끼다>에서 모두 말했다. 그 이상 김훈의 글과 책을 분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박웅현에게 김훈은 경외의 대상이다. 박웅현은 그를 빗대어 심지어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결례되는 표현이지만,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발견해낼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전거 여행>의 된장에서 발견한 삼각 치정관계에 대한 구절을 보면 정말 이 사람은 미쳤구나 싶습니다.” 

어디 글 쓰는 사람뿐이랴.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을 영화화 한 임권택 감독은 부담감으로 그의 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바 있다. 100편 넘게 영화를 만든 거장이지만 영상으로 옮기면서 그의 문장을 훼손할까 주저했다는 거다. “김훈 선생의 힘차고 박진감 넘치는 문장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길 것인가를 대단히 큰 과제로 생각했다. 그걸 해내지 못 했을 때 저 자신에게 오는 열패감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화장>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은 김훈의 문장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부담감을 토로한 바 있다.

늘 궁금했다. 기자에서 늦깎이 소설가로 입문한(무려 마흔일곱 살이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글을 쓰게 된 것일까? 또 어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은 것일까? 세상의 거의 모든 책을 읽는다면 그런 문장과 문체 구사가 가능할까? 김훈은 이런 질문에도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다. ‘그냥 안 피우면 된다’는 노승의 가르침대로 ‘그냥 안 피우게 됐다’는 그의 금연記 만큼이나 뜬금없고 허탈하다. 


그가 보기에 책 속에는 길이 없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말한다. 정작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단다. “사람들이 자꾸 책을 읽으라, 책을 읽으라 하잖아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심지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도 마뜩잖다.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글로 밥벌이를 하면서 이게 무슨 말일까?  

“책에 의해서 자기 생각이 바뀌거나 개조될 수 없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는 거죠. (중략)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그러는데, 내가 보니까 책 속에는 길이 없어요. 길은 세상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책 속에 있다는 그 길을 세상의 길과 연결해서, 책 속의 길을 세상의 길로 뻗어 나오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 독서는 무의미한 거라고 생각해요.”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 중에서. 

또 김훈은 책 읽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세상과 연결하는 일이다. 

“주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공자를 읽기 전과 일고 난 뒤의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힘들여서 뭐 하려 읽느냐, 책이 나를 개조할 수 없다면 그걸 구태여 읽을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 쓰인 모든 문제가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 시대의 멘토> 인터뷰 중에서. 

김훈은 말한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고. <사진 출처=경인일보, 부평아트센터>

몇 해 전 자기가 꽤나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한 사람(그 사람은 자기 계발서와 경영서를 인문학 책으로 생각했다)과 국내 로봇 분야에서 꽤 유명한 한 교수와의 저녁 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다. 책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그 사람이 물었다. “교수님은 요즘 무슨 책을 읽으시나요.” 그 교수 왈, “저는 철들고 난 후부터 책을 읽지 않아요. 책 읽을 시간도 없고요.” 


속으로 꽤나 웃었다. 물론 그 교수의 말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장사  한두 번 해보나. 무슨 말할지 뻔히 알았던 거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전혀 변할 줄 모르는 한 사람과, 그런 사람의 잘난 척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성깔 있는’ 교수의 저녁 자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불편했다. 그런데도 내 입술에서는 자꾸 웃음이 삐져나왔다. 실화다.

김훈의 이와 같은 책 읽기 철학은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된 카프카의 말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탐구와 관찰의 힘에서 비롯된 객관적·사실적 글쓰기  

김훈의 글쓰기 힘은 책에서 나온 게 아니다(신세는 졌겠지만). 관심과 관찰의 힘이다. 그 힘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문장을 만들었다. 세부적 묘사와 객관적, 사실적 묘사. 형용사와 부사가 과감히 생략된 남성적 글쓰기. 그것은 어쩌면 글쓰기를 통한 밥벌이의 출발이 기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기자가 ‘탐사취재’ 하듯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탐사취재’로만 완성된 글이 기사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단편소설 <화장>을 쓰면서 종합병원에 있는 의사 친구에게 부탁해 영안실에서 시체가 나가는 모습을 참관했다. 또 다른 소설 <개>를 쓰기 위해서는 진도의 진돗개 사육장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고 한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로 며칠을 고민하고 고치는 집착에 가까운 문장은 이런 탐사에서 얻어진 객관적 사실을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한 고뇌의 결과물이다.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탐미주의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건조하다'와 '탐미주의적이다'는 호응하지 않는다. 그것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글쓰기 소재로 삼는 주된 글감 때문인지 모른다. 이를테면 죽음 같은 것. 혹은 정념(情念)이 사라진 사랑 같은 것. 

책꽂이에 꽂혀 있는 김훈의 책들. 요즘 들어 '김훈 읽기'에 소홀했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칼의 노래> 중에서”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 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칼의 노래>를 꼽았다던가. 그래서인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는 ‘김훈체’를 연상시킨다. 노 전 대통령은 김훈의 말처럼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갔다. 운명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중략) 너무 슬퍼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중에서.  

김훈은 현실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역사소설에 천착하는 것에 대해 ‘현실 도피’라는 일부의 비난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런 그도 지난 4월 세월호 1주기 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화두는 ‘죽음’이었다. 


근래 들어 김훈의 책을 많이 읽지 못 했다. <자전거 여행> 필사에 도전 중인 후배가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과 산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글쓰기 공부니 뭐니 이런 목표의식 없이 그저 그가 바라본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관찰하는 마음으로, '책 속에는 길이 없다'는 그의 말을 새기며. 

그래도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책 읽기가 될 것이다. 무척이나 고된 책 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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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에 '자전거 레이서'라고 쓰여 있는 대목에 눈에 띈다. <사진 출처=책 남한산성 표지>

※덧붙임 : 말이 많았다. 그의 글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의 문장 몇 대목을 직접 읽는 것이 낫다. 

◇김훈의 문장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힐링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 -<세월호 1주기 추모의 글> 중에서. 


여관 창문 밖으로 썰물의 개펄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흰 달빛이 개펄 위에서 질척거리면서 부서졌습니다. 바다는 개펄 밖으로 밀려 나가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승에 뜬 달처럼 창백한 달빛이 가득한 그 공간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높은 소리로 울면서 저문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관방에서 당신의 몸을 생각하는 일은 불우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에서, 강이 흐르고 노을이 지고 바람이 불어서 안개가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고 새 떼들이 내려와 앉는 환영이 밤새 내 마음속에 어른거렸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화장>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자전거 여행>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바다의 기별>


간병인이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니까, 정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 말라붙어 있었다. 나와 아내가 그 메마른 곳으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화장>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정맥의 푸른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팔뚝을 따라 올라가서, 점점 희미해서 가물거리는 선 한 줄이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겨드랑이 밑에서부터 당신의 정맥은 몸속의 먼 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는다. -<바다의 기별>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뚜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자전거 기행>


메마른 땅과 뜨거운 햇볕은 여름 과일들의 고난이 아니다. 어디로 피서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황서영은 처가 마을 마재에 올 때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강은 흐르고 또 흘러서 합쳐지고, 합쳐져서 큰 물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 도성의 들을 적시고 먹이면서 바다에 닿았다. (중략) 흐르는 강물 위에서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갔고, 그 강물이 황사영의 마음속으로 흘렀다. 마음이 강물과 같아서, 마음이 세상으로 흘러 마음으로 세상을 이룰 때 세상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었다. -<흑산>


군법을 집행하던 날 저녁에는 흔히 코피가 터졌다. 보고서 쪽으로 머리를 숙일 때, 뜨거운 커피가 왈칵 쏟아져 서류를 적셨다. 코피가 터지고 나면 머릿속에서 빈 들판이 펼쳐지듯이 두통이 났고 열이 올랐다. (중략)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에는 식은땀에 젖었다. 의식이 다시 돌아올 때 나는 어둠 속에 걸린 환도 두 자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칼의 노래>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남한산성>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관계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자전거 여행>

소설가 김훈. <사진 출처=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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