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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28. 2015

하루를 살아도, 조르바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여름만 되면 평소 안 읽던 고전도 읽었던 모양이다. 책 속표지를 보니 2012년 6월로 쓰여있다. 그렇다. 7월도 아니고, 2011년도 아니고, 2012년 6월이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아프다. 책 읽을 때의 심정과 상황도 기억한다. 정신없이 밑줄을 치며 읽었던 그때의 순간들, 그때의 힘겨운 순간들을 이겨내려 유난히 많이 그었던 밑줄, 그 책 속으로 숨고 싶었던 나(결과적으로 잘 숨지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때의 순간은 지나가 어느새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그 순간을 견뎌낸(견뎌진) 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지만, 이 책과 밑줄을 쳤던 문장들은 그대로다. 다시 보니 밑줄을 그었던 연필의 자국은 더 진해진 것만 같다. 밑줄 친 곳만 다시 읽어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새롭게 조르바를 만나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처음 알았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밑줄 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슈바이처는 카잔차키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갔다.”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 번은 더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고 찬사를 보냈고, 콜린 윌슨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조르바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 단 아전인수식 해석은 금물.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 


조르바가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안다.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었든 읽지 못했든 ‘자유’, 혹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상징되는 조르바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는 한 번쯤 들어봤다. 카잔차키스도 책 곳곳에 조르바의 흔적을 남겼다. 책은 오로지 조르바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가 하는 말, 생각, 동작, 행동의 종합. 그것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글로 만들어진 조르바를 봤을 뿐이지만 그를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 만날 것 같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화자(話者)인 ‘나’는 이렇게 조르바를 묘사한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말이다. 조르바를 가장 조르바처럼 보이게 하는 대목은 조르바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때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작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한 장면. 앤서니 퀸이 조르바 역을 맡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 "걷다가 죽어버려라" 


하지만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조르바의 ‘자유로운 죽음’이다. 소설 속 그의 삶이 조르바라는 가장 매력적이고 치명적인 캐릭터를 만든 것이 아니다. 조르바가 죽음은 그 어떤 소설에서도 만나지 못한 치명적 죽음이다. 조르바의 죽음을 전하는 지인의 편지로 책은 끝을 맺는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우리가 달려가 말렸습니다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 가로 갔습니다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서서 죽는 것끝까지 움직이다 죽는 것일찍이 철학자 김영민은 죽음의 의미를 간파하고 자신의 저서 <보행>에서 이렇게 적었다. “종교와 형이상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든 서구의 전통에 의하면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가 된다널리 알려진 것처럼소크라테스의 경우,  ‘철학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죽는 것, 그리고 죽음의 상태를 추구한다.” 

죽음의 철학을 논()한 것은 서양의 철학자들이지만 그것을 행()한 이들은 동양의 선사들이었다김영민에 따르면 경통 선사는 신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삿갓을 쓰고 불길 속으로 걸어가 입적했다천연 선사는 선 채로 눈을 감았으며 현태 선사는 혼자 법당에서 합장을 한 채 서서 입적했다그리고 승찬은 자신이 떠날 때가 되자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나뭇가지를 잡고 임종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서양의 철학자와 동양의 선사들이 논하고 행한 죽음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글쟁이’ 김영민은 이렇게 일갈한다. “삶의 전부를 안고, 온갖 형이상학의 그 밑동을 모조리 다 드러낸 채 그는 홀연히 이곳에 있는 듯 없어져 버린 것이다. 철학이 죽음의 연습이라고 한다면, 대체 이보다 더한 철학이 어디에 있을까? 아, 걷다가 죽어버려라.”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뜨겁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철학박사 강신주도 자신의 강연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조르바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렇게 죽고 싶다’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살고 싶다’의 이음동의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서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후회 없는 삶’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열정과 자유 의지를 버리지 않는 것. <그리스인 조르바>가 위대한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는 그런 철학적 화두를 문학적으로 녹였기 때문이다. 

여름휴가가 목전이다. 나도 감히 ‘내 맘대로’ 여름휴가에 읽기 좋을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물론 <그리스인 조르바>는 빠졌다. 이 책은 놀고 쉴 때 읽을 책이 아니다(자칫 조르바의 여성 폄하 발언만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가 더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 사람의 관계가 더없이 가볍게 느껴질 때, 그래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허전함이 느껴질 때 펴들면 좋은 책이다. 

장담한다. 난생 처음 소설책에 새까맣게 밑줄 긋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을 번역한 이윤기의 ‘옮긴이의 말’에서조차. “생전에 카잔차키스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어쩌면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였는지도 모르겠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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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의 문장들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서서히 멀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 깨끗이 헤어지고 아픈 가슴을 다독거리는 편이 훨씬 나았으리.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니까. 그러나 그 비 오던 새벽에 나는 친구를 떠날 수 없었다(뒤에 그 이유를 알았지만, 어쩌랴, 이미 때가 늦은 것을). 

▶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나른 것일 수 있었을까.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나는 먹이를 채는 새처럼 목을 뽑아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면서도 우리의 눈은 하릴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 모습, 몸매와 몸짓을 기억하려고 하니. 부질없어라,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르렀던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을.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교장 선생,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그 사람의 건투를 빌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떄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자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거지!" 

▶나는 먹이를 채는 새처럼 목을 뽑고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가는 헤어지면서도 우리의 눈은 하릴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 모습, 몸매와 몸짓을 기억하려고 하니…. 부질없어라,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르렀던지를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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