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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ug 10. 2015

살면서 딱 한번은 '낭만기사' 돈키호테처럼

<돈키호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누군가 말했다. ‘고전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은 책’이라고. 혹은 남들은 좋다는데 나와는 무관하거나, 괜히 남들  따라 하느라 고생한 책이라고. 나에게 고전은? 그냥 ‘안 읽은 책’이다. 그래서 ‘언젠간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한가롭게 고전의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시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래서 고전 읽기는 밀린 숙제이자 낭만적인 꿈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너무 친숙해 마치 내가 최근에 읽었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어린이 세계문학전집(고전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착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이 전부였다. 우화이자 만화 같은 모험담인 줄 알았던 돈키호테가 그렇게 장엄한 서사이며, 현대성을 갖춘 유럽 최초의 소설이자,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훗날 커서야 알았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추억하다   


<돈키호테>의 스토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이나 읽은 사람이나 기억하는 줄거리는 비슷하다. 어쩌면 이것도 고전이 갖는 매력 중의 하나 이리라.


라만차라는 시골마을에 아론소 키아노라는 몰락한 귀족이 살았다. 그는 중세의 기사도 소설에 심취하다가 정말 자신이 기사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라 짓고, 멋 훗날 돈키호테만큼이나 유명해진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 도중에 농부 출신 ‘산초’를 시종으로 삼는다(그가 시종이 된 것은 섬 하나를 주겠다는 돈키호테의 감언이설 때문이었다고). 쇳조각을 붙여 만든 갑옷에 삐쩍 마른 말,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볼품없는 기사였지만 위풍도 당당히 세상을 향해 출정한다.


1605년 돈키호테 초판


"운명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좀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느냐. 나는 저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이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 악의 씨를 뽑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돈키호테)


"주인님.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인데요. 팔처럼 보이는 건 날개고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면서 풍차의 맷돌을 움직이게 만들지요."(산초)


"그건 네가 이런 모험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저놈들은 거인이야. 만약 무섭거든 저만큼 떨어져서 기도나 하고 있거라. 나는 저놈들과 유례가 없는 치열한 일전을 벌이러 갈 테니까.“(돈키호테) 


소설 속 이런 장면은 돈키호테가 어떤 인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풍차와의 일전을 겨루는 돈키호테가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이다. 또 이상주의적 인물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적 인물 산초의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Dream the impossible),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Do the impossible love),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Fight with unwinnable enemy),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Resist the unresistable pain),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원작에는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뮤지컬 <랜 오브 라만차>에 나오는 노래(이룰 수 없는 꿈. Impossible Dream)의 가사 한 소절도 들어보자. 개인적으로 ‘풍차’와의 일전을 벼르는 돈키호테보다, 이렇게 노래하는 돈키호테가 더 ‘돈키호테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풍차를 공격하는 돈키호테. 1885. 오노레 도미에 작.


17세기 초 스페인은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반종교개혁운동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다. 자유나 평등,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그런 개념조차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의 세르반테스는 종교의 자유, 연애의 자유, 계층 간의 평등, 정의로운 재판을 꿈꿨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 과대망상증에 걸린 돈키호테였다. 돈키호테의 무모하지만 낭만적인 모험과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한 것이다.  


물론 결론은 패배였다.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고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래도 돈키호테는 굴하지 않았다. 자신을 미쳤다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다. “누가 미친 거죠? 앞으로 이뤄야 할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들이 미친 거요?” 


돈키호테는 결국 마지막 결투에서 지고 오랜 모험을 끝낸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편안한 죽음을 맞는다. 몽상가 돈키호테에서 평범한 몰락 귀족 아론소 키아노로 돌아온 것이다. 산초는 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졌다고 한다. “죽을 땐 현명한 사람이 돼 죽고, 살 때는 미친 듯이 살라.”

   

행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다 죽은 소설 속 인물 돈키호테의 삶을 동경했다. 혁명가 체 게바라는 자신의 편지에서 “나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라고 적었고,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역사에서 3대 바보가 있는데 그 세 명은 예수와 돈키호테, 그리고 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돈키호테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자유로운 영혼, 세상을 향한 조롱,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조르바의 자유로운 삶과 죽음은 돈키호테의 그것과 닮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오노레 도미에 작


돈키호테처럼 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누군가 주변에 실제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있다면 참 불편할 것 같다. 잘못하면 ‘환자’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갈수록 절망적이고 우울한 일들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대한 자본과 권력을 향해 저것은 ‘풍차’라며 과감히 맞설 줄 알고, 생각보다는 행동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항상 돈키호테처럼 살 수도 없다. 그래도 한 번쯤은, 혹은 한 가지 일에는 돈키호테처럼 앞뒤 재지 않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삶을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삶이 팍팍해지는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아보려고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늘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딱 한 번 ‘돈키호테’가 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게 뭐든.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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