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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02. 2015

과학적 사고의 첫 번째 도구 '정확하게 실수하기'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나는 선수 시절 9천 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3백 번의 경기에서 졌다. 경기를 승리로 이끌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고도 실패한 적이 26번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인생에서 거듭 실패를 계속해 왔다. 이것이 정확히 내가 성공한 이유다.”


실패의 성공학이 강조되면서 자주 인용되는 마이클 조던의 얘기다. 농구선수 시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별생각 없이 한 얘기겠지만 이러한 실패(실수)가 과학적 사고와 사유의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은 본인도 알지 못 했을 것이다. 이른바 ‘실수하기’. 철학자이면서도 과학에 대해 숱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 가운데 첫 번째 도구다.  

    

실수하기가 과학적 사고를 위한 첫 번째 생각도구라고? 대닛의 얘기를 들어보자. GPS가 없던 시절 항해사들은 망망대해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려면 먼저 자신의 위치를 파악(추측) 하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의 위도와 경도를 대부분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조금 오차가 생겨도 상관없다. 사소한 계산을 몇 번 더 하면 오차를 파악하고 수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정확하게 실수하기’. 대닛의 말처럼 “실수를, 고치는 것이 의미가 있을 만큼 아주 정확하게 저지르는 것”이다.   

  

저자 대니얼 데닛. <사진 출처=동아시아 출판사>


과학자들은 실수하지 않아야 성공하는 마술사와 달리 실수해야 성공하는 사람들이다. 마술사는 실수를 감추지만 과학자들은 실수를 드러낸다. 정확한 실수를 많이 할수록 정확한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동료의 연구 결과를 폄하할 때 심지어 “틀리지도 못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정확하게 실수하기를 자신이 고안한 생각도구의 첫 번째로 언급하며 데닛은 이렇게 강조한다. “좋은 실수를 저지르기 위한 핵심 수법은 실수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맞설 사람   


MIT의 인공지능 대가인 마빈 민스키는 이 책의 저자 데닛을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맞설 단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으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는 이 말에 빗대어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라고 소개했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는 데닛이 고안한 77가지 직관펌프에 대해 ‘머리를 단단한 망치로 내려치는 깜짝 놀랄만한 자극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소 과장된 표현도 있지만 과찬은 아닌 것 같다.      


데닛은 자신의 사고 영역을 철학에서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컴퓨터과학으로 확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고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생각도구(이것을 직관펌프라고 명명했다)를 스스로 고안하고 무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효과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 세계 석학들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여기에 있다.

직관펌프는 이성적이며 과학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생각의 매뉴얼이다. <사진 출처=동아시아 출판사>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는 그 비법을 전수한 책이다.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데닛의 생각도구 따라하기(혹은 흉내 내기)'. 가장 큰 소득은 직관펌프로 명명된 생각도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과학적 지식을 만나는 것은 덤이다.      


우리는 도구 없이 살 수 없다. 태초에 손과 발이라는 도구가 있었고, 먼 옛날 사냥을 하고 집을 지을 때도 도구를 사용했다, 지금은 첨단과학의 산물로 만들어진 유용한 도구들을 사용한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미세한 세계부터 직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까지 도구를 통해 하나씩 정복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는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일 것이다. 도구를 이용해 삶의 영역을 넓혀온 것처럼 우리는 생각도구를 통해 사고와 인식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마치 손이나 발처럼.


수학은 가장 뛰어난 생각도구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서는 이런 도구는 언급만 할 뿐 직관펌프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각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유용한 것은 실수하기, 비판적으로 논평하기, 쓰레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 일반인 청중을 미끼로 쓰기, 심오한 함정 조심하기 등과 같은 의미, 의식, 자유의지, 혹은 진화에 기반을 둔 생각도구들이다. 역사를 뒤바꾼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애용했던 기본적인 생각의 도구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보다는 저자 자신이 직접 갈고 닦아 문제 해결에 사용했던 도구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목표는 직관펌프가 무슨 용도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대니얼 데닛을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라고 표현했다. <사진 출처=동아시아 출판사>


비판적으로 논평하기쓰레기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기   


예를 들어 첫 번째 범용 생각도구인 ‘실수하기’에 이어 ‘비판적으로 논평하기(래퍼포트 규칙)’ 역시 과학적 사고와 논쟁에서 아주 유용한 생각도구다. 사회 심리학자이자 게임 이론가인 아나톨 래퍼포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상대방 이론이나 견해의 모순을 지적하되 품격 있는 논쟁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의외로 쉽다. 첫째, 상대방의 입장을 명확하고 생생하게 다시 언급한다. 둘째, 의견이 일치하는 지점을 모두 나열한다. 셋째, 상대방에게 배운 것을 모두 언급한다. 넷째, 이렇게 한 다음 반박하고 비판하다.      


‘쓰레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스터전 법칙)’도 흥미롭다. “과학소설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쓰레기가 아닌 나머지 10퍼센트다”라고 말한 과학소설 작가 테드 스터전의 연설에서 착안했다. 데닛은 좀 더 노골적이다. “분자생물학 실험의 90퍼센트, 시의 90퍼센트, 학술지에 게재된 수학 논문의 90퍼센트, 그 밖의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똥이다.”


이 도구의 쓰임새는 명료하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인내심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연구성과, 최고의 논문과 작품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90%에 매달리면 상대를 희화화하고 조롱하고 트집 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과학적 사고와 사유의 가장 큰 적이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범용 생각도구 12가지+분야별 생각도구 55가지   


이 같은 범용 생각도구가 12가지다. 어떤 분야든 어디에서든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도구인 셈이다. 비교적 간단한 도구지만 과학적 사고와 논쟁이라는 ‘전투’에서 살아남고 이길 수 있도록 유용하게 만들어졌다. 집 어딘가에 고장이 생겼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공구 상자, 갑자기 누군가 아플 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약품 상자와 같다. 나머지 생각도구들은 의미, 진화, 의지, 자유의지 등 주제에 따라 분류했다. 좀 더 복잡하거나 특정된 분야의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맞춤형 도구들이다. 사용 범위는 좁지만 더욱 예리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77가지 생각도구들이 ‘머리를 단단한 망치로 내려치는’ 직관펌프를 구성한다.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직관펌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고나 행위에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말미에 적힌 대닛의 이런 얘기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인다면 왜 그토록 자신만의 생각도구, 직관펌프를 강조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에서 의미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생명이 어떻게 생기고 진화했는지,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유의지가 우리의 타고난 재능일 수 있는지 온전히 상상하는 일에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발전은 있었다. 지금 제기하고 다루는 질문은 예전의 질문보다 나아졌다. 답이 코앞에 있다(p519).”


그리고 이런 질문들. 규칙에서 어떻게 의미가 나왔는가? 물질에 불과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라는 특이한 현상이 나올 수 있는가?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의식을 가진 기계는 가능한가? 과학과 종교는 양립 가능한가?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러한 지적 난제와 힘겹게 싸워서 얻은 ‘지식 레시피’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데닛의 직관펌프를 따라가다 보면 현미경이나 망원경 역할을 하는 생각도구도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쾌재를 부르기는 이르다. 책은 두껍고, 과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기초 문제가 지뢰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 과학이 그렇듯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난제도 많다. 실제 레지스터 기계 문제는 친절하게 문제풀이까지 부록으로 실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책을 읽고도 직관펌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너무 빨리 포기하지는 말자. “답이 코앞에 있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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