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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01. 2015

그 모든 원인은 총, 균, 쇠

행복한 고전 읽기③-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한 달 계획했는데 딱 한 달이 걸렸다. 일종의 의무감으로 시작했다. <코스모스>를 읽고 고전에 도전해보겠노라 마음먹고 겁 없이 덜컥 정한 책이 <총, 균, 쇠>. 조금 쉽고 얇은 책으로 정할걸, 이번에도 700쪽이 훌쩍 넘었다. 읽는 내내 후회했다. 정말 다 읽을 줄은 몰랐다. 일단 격려의 박수.
 

<총, 균, 쇠>는 너무 유명해서 설사 읽지 못했어도 스포일러  한두 번은 안 접해본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심지어 나도 대충 무슨 책인지는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7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질문은 하나다. '왜 유럽의 민족들은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민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했는데, 왜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민족들은 유럽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하지 못했을까?'


이 책의 저자이자 생태학자였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1972년 열대의 섬 뉴기니의 해변을 걷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류의 진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그는 뉴기니의 ‘남다른 정치가’로 알려진 얄리를 우연히 만나 해변을 같이 걷게 된다. 얄리는 다이아몬드가 수행하고 있는 뉴기니의 새들에 관한 연구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과거 수만 년 동안 어떤 경로를 통해 뉴기니에 도착했는지, 또 유럽의 백인들은 어떻게 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는지. 얄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문명)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

그리고 25년이 지난 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를 통해 얄리가 던졌던 그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부와 힘은 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포하게 되었을까? 예를 들자면 어째서 아메리가,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유럽 및 아시아 민족들을 죽이고 복속시키고 몰살하지 못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환경적 차이, 혹은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이야기는 1만 3000년 전의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는 모든 인류가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갔다. 하지만 각 대륙에 살고 있던 인류는 서서히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국,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지역은 야생 동식물을 일찍부터 가축화, 작물화하는데 성공한다. 가축화와 작물화는 한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다. 말과 소, 돼지를 일찍부터 가축화하고 밀과 옥수수, 벼를 작물화한 사회는 문자와 기술, 정부와 제도를 갖추게 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본문.
<총, 균, 쇠>를 읽는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기서 또 질문. 그렇다면 왜 어떤 지역은 가축화, 작물화에 성공했는데 왜 다른 지역은 성공하지 못했나? 이유는 단순하다. 관습도, 인종도 아닌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유럽의 민족들이 일찍부터 말과 돼지를 가축화했던 것은 그 지역이 말과 돼지의 가축화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초승달 지역의 여러 민족들은 훨씬 오래전부터 토종 식물을 작물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종을 작물화했고, 집중적인 식량 생산을 발전시켰으며, 인구를 더 빨리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더 진보된 기술, 더 복잡한 정치조직, 더불어 다른 민족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 더 많은 유행병을 갖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 등장한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성적 매력은 물론 돈, 자녀 교육, 종교 등등.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행복한 결혼과 행복한 가정은 만들어지지 못한다. 

작물화나 가축화도 마찬가지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존 밀레이의 '페루의 잉카를 잡는 피사로'. <사진 출처=네이버캐스트>


이런 문명의 차이가 어떤 비극을 가져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532년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첫 만남은 가장 드라마틱하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만남으로 기록된다. 

그 해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의 고지대 도시에서 마주친다.  피사로의 스페인 부대는 168명에 불과했다. 반면 아타우알파는 8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피사로는 채 몇 분이 지나기 전에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몸값으로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의 방을 가득 채울 황금을 요구한다. 잉카족들이 몸값을 지불하자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처형해버린다. 


살육이 시작된다. 스페인 군대는 말을 탄 62명의 병사와 106명의 보병이 전부였지만 자신들의 500배에 달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대군을 마치 나무 베듯 쓰러뜨린다. 잉카인 수천 명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치명적 부상을 입지만 스페인은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피사로의 동생이 참혹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20~30km에 걸쳐 계곡 전체가 인디언들(의 시체)로 완전히 뒤덮였던 것입니다. 이미 밤이 되었지만 우리의 기병대는 계속 들판에서 인디언들을 찔러 죽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밤이 오지 않았다면 인디언 대군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죽어 넘어진 인디언들은 6000~7000명에 달했고 팔이 잘리는 등 부상을 당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영화 <미션>의 한 장면. 주제는 다르지만 유럽과 남미 원주민의 문명 접촉이 가져온 비극을 다뤘다.
책 읽는 동안 자꾸 영화 <미션>이 생각났다.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문명의 만남

이 비극적인 살육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초기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은 불과 수십 명의 기마병들이 번번이 수천 명의 인디언들을 참패시키는 대살육으로 막을 내렸다. 다이아몬드는 그 원인을 결국 총, 균, 쇠에서 찾는다. 

“피사로가 성공을 거두게 한 직접적 원인에는 총기, 쇠 무기, 말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기술,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유럽의 해양 기술, 유럽 국가들의 중앙집권적 정치조직, 문자 등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총 균 쇠>는 그러한 직접적 요인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 요인들 덕분에 근대의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땅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 반대가 되었을까? 어째서 인류의 발전은 각 대륙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됐을까? 

다이아몬드가 설명하는 그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 명료하다. 식량생산과 병원균, 기술, 정치조직, 문자. 이 가운데 식량생산은 다른 요인들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식량생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작물화와 가축화 여부다. 유라시아와 달리 아메라카에서 식량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원인은 전적으로 이들 지역에 작물화, 가축화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와 같은 요소를 발전시켜 정치적, 경제적 힘을 쌓은 반면 어떤 민족들은 그런 힘을 발전시키지 못 했다.


결론을 하나 더 추가하면 이렇다. ‘문화적 차이는 환경적 차이의 산물이다.’

이렇게 세계사와 인류의 흥망성쇠를 정리한 다이아몬드의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환경 결정론’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수긍이 간다. 책을 읽다 보면 환경적 요인이 그 모든 것을 결정짓고, 또 모든 역사적 사건과 흔적들을 그러한 논리에 꿰맞추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책 본문 중에서 한글을 설명하며 소개된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

하지만 백인이 흑인이나 황색인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보다는 훨씬 타당하다. 이 책이 출간되기 얼마 전까지(혹은 출간된 후에도) 결국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렇게 궤멸한 것은 유럽인들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재미는 다이아몬드의 한글 예찬이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문자의 운용 원칙과 형태 등 모든 세부 사항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 체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냈다. 세종은 음소를 블록 안에 배열하여 음절별로 분류하도록 했고 특정 문자 형태가 정해진 소리를 대표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특정 자음을 발음할 때의 혀와 입술 모양에 착상한 자음의 형태를 생각해냈다.” 



◇내용 이해 못해도 책읽기, 고전읽기의 즐거움 

<총 균 쇠>가 아쉬운 점은 번역이다. 원문을 잘 전달하기 위해 너무 직역만 고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장편의 논문을 읽는 기분도 든다. 아마 원문이 그랬을 것이다. <코스모스>를 읽을 때 느꼈던 거대한 서사와 디테일한 서정적 느낌을 이 책에서는 마주하기 어렵다. 

2013년인가. <총, 균, 쇠>가 서울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가장 빌려본 책 1위에 오르며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런데 통계치를 보니 그해 1월부터 12월까지 총 137회 대출됐다고 한다. 그 대출 횟수가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서울대 학생들의 독서 수준이 그렇게 높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통계 숫자와 관계없이 실제 이 책을 대출해서 읽은 학생들은 독서의 즐거움, 특히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이아몬드가 펼치는 주장에 대해 논평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다만 나 역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총, 균, 쇠>를 읽는 시간만큼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지적 탐험, 혹은 여행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했느냐 못했느냐와는 무관하다. <코스모스>와 마찬가지로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감히 권한다. 

사족 하나.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자꾸 ‘제레미 아이언스’로 읽는다. 처음 입에서 잘못 나오면 그 말이 자꾸 입에 붙는데 이것도 일종의 질환이 아닌지 모르겠다. 카페에서 아포가토를 주문할 때 "아포칼립토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p.s : 탄력 받은 김에 다음 책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정했다. 그나마 이 책은 500페이지 정도에 불과(?) 하니 왠지 만만해 보인다. 9월 한 달(혹은 보름은)은 빌 브라이슨과 놀아볼 생각이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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