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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ug 23. 2015

바이러스의 인류 파괴史

<전염병의 문화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홍조와 재치기, 발열. 시작은 비슷했고 크게 심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곧 악몽과 대재앙이 시작됐다. 참기 힘든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기침, 구토, 설사가 반복되고 부스럼은 궤양으로 변했으며 혀와 목구멍에는 피가 맺혔다. 그들은 갈증을 달래기 위해 우물로 뛰어들었고 우물과 거리, 사원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다. 


기원전 430년 정체불명의 역병(홍역이나 두창, 인플루엔자로 추정만 될 뿐이다)이 아테네를 엄습했다. 도시는 시체로 덮였고 시체를 뜯어먹은 새와 짐승들도 죽었다. 아테네 함대와 그곳에 있던 페리클레스를 포함해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됐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손가락과 발가락, 시력, 기억력을 잃었다. 당시 연대기 작가였던 투키디데스는 “이 역병의 참상은 인간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아테네는 몰락했다.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도 역병이 돌았다. 감염자들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목에 림프선 종창이 생기고 열이 폭발적으로 오른 뒤 5일째가 되면서 절반 이상이 죽었다. 추운 겨울이 오자 상황은 더 끔찍해졌다. 기침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사망자가 하루 1만 명에 달하자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한 시체의 탑, 시체의 성이 됐다. 

지난 2013년 개봉했던 영화 <감기>의 한 장면.

보통의 역병(a plague)이 아니라 바로 ‘그 역병(the plageu)’,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지중해의 해안 도시를 따라 빠른 속도로 확산됐고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 덴마크까지 휩쓸었다.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수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거의 모든 도시는 황폐화됐으며, 유럽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비잔틴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전인류를 거의 멸종시킬 뻔했던 전염병”이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질병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신화


15년 전 국내에 출간된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를 다시 펴든 이유는 하나다. 우리나라를 혼란과 공포에 빠뜨린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근)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메르스 얘기는 없으며,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메르스라는 중동발(發) 전염병의 등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coronavirus; MERS-CoV)는 2012년에서야 처음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메르스와 같은 새로운 전염병의 발병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병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 뒤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감염성 질병의 창궐을 정확히 예측한다. 실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질병이 다시 발생하고, 후진국이나 오지에서나 발견됐던 질병이 선진국이나 거대한 도시에서도 출몰하고 있다. 어떤 질병은 더욱 강력한 독성과 내성으로 무장한 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메르스 확산이 한창일 때 서울 명동거리 이미지.  <사진 출처=한국일보>

“새로운 질병 가운데 몇몇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수십 가지가 있다.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에 일어난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과 미생물에 나타나는 진화의 속도가 광포할 정도로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한 가지 질병이 정복되면 또 다른 것이 새로 등장하든지 아니면 재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수십 가지의 감염병이 위생 유토피아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


전염병의 구체적인 의학적 메커니즘과 원인, 대처 방안 등을 알기 위해서라면(물론 각각의 질병에 대한 적지 않은 전문적 지식을 담고 있지만) 이 책을 덮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인간을 지배해온 질병의 역사와 그 질병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인류가 세균성, 바이러스성 질병들과 어떤 전쟁을 치렀고, 앞으로 어떤 전쟁을 치르게 될지 이해하는데 이 책은 훌륭한 참고서 역할을 한다.


전염병이 출몰할 때마다 겪는 혼란과 무지야만성

기원전 5세기 정체 모를 역병이 아테네를 몰락시키고, 6세기 중반 페스트가 동로마 제국을 파괴한 이후에도 감염성 질병은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히고 도시를 파괴했으며, 심지어 문명을 파괴했다. 발진티푸스는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궤멸시켰고 유럽에서 건너온 홍역과 두창은 신대륙의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1918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적어도 2000만 명, 많게는 1억 명을 죽였다. 한반도에서도 1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도 있었다.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이후 새로운 악성 질병들의 출현 빈도는 높아졌지만 유라시아에서 횡행했던 전쟁과 역병도 조용해졌다. 개량된 경작법, 온화한 기후 등으로 인구가 늘고 부가 증가했다. 무엇보다 유행병의 소멸 덕분에 유럽의 인구는 서기 1000년~1300년 사이에 정점을 찍는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 유럽에는 딱 세 가지의 심각한 질병만 있었다. 발한증과 나병과 결핵. 묘하게도 나병과 결핵은 ‘교차 면역’을 갖고 있어 서로의 위력을 떨어뜨렸다. 

앙투안 장 그로의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9년 3월 11일>.   

평화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 했다. 카파(현재의 페오도시야)라는 크림 반도의 항구도시에서 대재앙은 시작됐다. 이 도시에는 3년 동안 몽골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고 성벽 안에는 제네바의 상인들도 있었다. 흑사병이 몽골군을 습격했고, 적이 아니라 페스트균에 패해 후퇴를 결정한 몽골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시체들을 성벽 안으로 던진다. 성에서 풀려난 살아남은 제네바 상인들은 고향으로 향했고, 그들이 지나간 지중해의 도시마다 흑사병이 창궐했다. 유럽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등에서 4분의 1, 혹은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후 유럽인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이 재앙을 ‘대몰살(Great Dying)이라고 불렀다. 


저자인 아노 카렌은 단순히 어떤 역병에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됐느냐에 관심을 두는데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출몰할 때마다 겪는 혼란상과 사람들의 무지, 야만성에도 주목한다. “전 유럽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마인츠에서만 1만 2,000명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탄다. (중략) 늘 그렇듯이 역병은 신의 천벌로 보았다. 유럽의 거리마다 수만 명의 고행자들이 자신을 채찍으로 갈기며 속죄함으로써 신의 분노를 달래려 애썼다.”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국내에서 메르스가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가 병원을 중심으로 확산된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치료와 구원을 받기 위해 몰려든 교회가 감염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교황은 고행자들의 행진을 축복했지만 그들의 수가 많아지고 폭도로 변하자 화형으로 억압했다. 물론 흑사병은 계속됐고, 사람들의 믿음은 약해졌으며,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다. 

메르스 바이러스. <사진 출처=위키 백과>

메르스의 낙타가 그런 것처럼 동물에게는 죄가 없다. 바이러스의 안전한 숙주인 것은 분명하지만 야생에서 평화롭게 살던 동물들은 거의 해를 끼치지 않았다. 문제는 가축화와 도시화였다. ‘20세기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AIDS)조차 사람들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생태계가 훼손되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원숭이와 사람과의 접촉이 잦아진 탓이다. 에볼라도 마찬가지이며 한때 국내에서도 공포를 몰고 왔던 광우병 역시 갈수록 대형화되는 축산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인간과 병원성 미생물들 간의 이 오랜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저자의 전망은 일단 비관적이다. “21세기는 인류에게 야만적인 시험을 부과할 것이다. 감염성 질병은 세계의 주요 사망 원인이다. 앞으로도 그것들은 오랫동안 접근을 기다리며 남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더욱 많은 인수 공통감염병, 더 많은 돌연변이와 약물 내성 세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 질병의 역사는 적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다독인다. “경계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영장류 조상들도 새로운 질병과 맞서야 했고 석기 시대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농민과 도시인들도 역시 그러했다. 갈등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도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던 2002년 사스(SARS), 2008년 광우병 사태, 2009년 신종 플루도 포함될 것이다. <전염병의 문화사>가 질병의 감염 경로나 피해 상황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상까지 면밀하게 들여다봤던 만큼 그 사건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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