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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ug 26. 2015

귄터 그라스,
혹은 마구 갈겨쓰기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를 다시 추억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귄터 그라스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양철북> 말고는 다른 그의 작품을 접한 적이 없다. 고인에게는 정말 죄송한 얘기지만, 그 <양철북>조차도 나에겐 책이 아니라 영화로 기억되어 있다. 그래, 순전히 영화(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와 관련된 기억) 탓이다. 만약 <양철북>을 영화가 아니라 책으로 먼저 읽었더라면, 그때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귄터 그라스라는 작가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늦은 봄이었는지 초여름이었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와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왜 그 영화였는지도 불분명하다. 다른 볼 영화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 '폼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는지.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칸영화제 작품상과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니 폼 잡기에는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우리가 함께 처음 본 영화는 <양철북>이었다. 그건 데이트였을까? 하긴 남녀가 밥 먹고 영화 보고 커피 마시는 것을 보통의 데이트라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데이트(그것도 첫)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첫 영화로 <양철북>을 봤다.


여기서 <양철북>의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후 독일의 상처와 사회상, 전쟁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등의 '폼난' 영화평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그녀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누지 못 했다. 


◆그녀와 처음 함께 봤던 영화 <양철북>

영화는 어려웠고, 극단적이었으며, 때론 혐오스러웠다(그렇다고 이 영화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하긴 세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의 혐오스러운 모습에 성장을 멈추기로 한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편한 영화가 될 리 없었다. 그녀도 말이 없었다. 불편했을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불편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중에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책을 읽긴 했지만 영화의 기억 때문일까, '읽었다'기보다는 '책장을 넘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덮었다. 자꾸 영화의 장면이 겹쳐졌다. 그리고 영화를 볼 때의 불편했던 기억과 느낌들이 자꾸 살아나 도대체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실제 나중에 어디선가 영화평을 보니 원작에 충실하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영화 <귄터 그라스>의 한 장면. 

하지만 아직도 몇 장면만큼은 뚜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와 삼촌(관계는 불분명하지만 하여간 근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탁자 밑으로 나누는 애정행각이라든지, 뱀장어를 잡기 위해 목을 잘라 던져놓은 말(소였던가?) 머리에서 뱀장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라든지, 그리고 그 뱀장어를 강제로 먹이려 하는 장면이라든지, 살아있는 생선을 뜯어먹는 장면 등은 아직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주인공 꼬마의 그 초인적 비명. 유리창을 깨고, 모든 사람들의 귀를 막게 하는 그 비명이 자꾸 귓전에 맴돈다. 


결국 그녀와의 두 번째 '데이트'는 이루어지지 못 했다. 우연히 만나고 연락이 되긴 했지만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한 주인공의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거기서 진도를 멈추고야 말았다.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 장면처럼 스치듯 몇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더없이 통속적이니(통속적이지 않은 남녀 이야기가 있겠냐만은) 그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자. 슬프게도,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다.


귄터 그라스가 사망했다는 부고 뉴스를 접하고 '첫사랑(따위)'의 기억이나 떠올리는 불충한 독서 애호가라고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이런 사연을 듣는다면 고인도 본인의 작품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나를 크게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찌 됐든 나는 <양철북>, 귄터 그라스와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 했다. 마치 첫 데이트에서 처음같이 영화를 본 뒤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한 그녀처럼. 다만 값진 교훈은 하나 얻었으니 '처음 같이 보는 영화는 무조건 즐겁고 유쾌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후배들이나 연애를 막 시작하는 지인들에게 오지랖 넓게 꼭 강조하곤 한다. 완전히 친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절대적으로, 즐겁고 유쾌하며 아름다운 영화만 보라고. 

귄터 그라스. <사진 출처=시사인>

◆"마구 갈겨썼던" 작가…어찌 됐든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이런 개인사와는 관계없이 귄터 그라스는 위대한 작가였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라서 그가 '위대한 작가'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 잘못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작가였다. 작품 속에서만 현실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현실에서 작품을 쓴 작가였던 셈이다. 

특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해 황석영과 김지하 등 한때 탄압을 받았던 문인들의 구명활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심지어 김지하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한국을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문인을 감옥에 가두는 한국 정부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했다. 그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황석영 작가는 지난 4월 이런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귄터 그라스는) 전쟁의 상처와 상흔을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문학적으로 가장 먼저 보여준 작가였다. 귄터 그라스의 문학적 업적과 세계 평화나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 그의 작가적 행동이 남은 작가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가 떠나면서 20세기를 가장 치열하게 보낸 작가들이 세상을 하나 둘 떠나는 것이 실감 난다. 하지만 그 시대의 잔재와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메르켈 총리는 귄터 그라스의 부인에게 이 같은 애도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라스는 독일 전후 역사를 보듬고 주조하는 데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독일은 깊은 존경심으로 그와의 작별을 고합니다." 또 소설 <악마의 시>로 유명한 살만 루시디는 자신의 트위터에 "진정한 거인이자 영감(靈感), 그리고 친구인 그라스에게 북을 울려주렴, 오스카(양철북의 주인공 이름)여!"라는 글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귄터 그라스는 지난 4월 눈을 감았다.

소설가 김연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마구 갈겨썼던' 작가였다. 그라스는 <양철북>의 초고를 쓰던 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이따금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나는 영화 장면에 나오는 것 같은 파리의 간이식당에 들어가 각 장의 초안들을 마구 갈겨썼다. 비극적으로 얽혀 있는 연인들 사이에서, 외투에 파묻혀 있는 노파들 사이에서, 거울 벽면들과 유겐트 양식의 장식들 사이에서 나는 '친화력'에 관해서, 괴테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무언가를 썼다." 

김연수는 <양철북>을 소개한 글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구 갈겨썼다'. 소설을 사랑한다면 기억해야만 할 구절이다. 대개의 경우, 좋은 소설은 마구 갈겨쓰는 데서 시작하니까." 

누구는 마구 갈겨썼는데 위대한 작가로 남았고, 누구는 마구 갈겨썼더니(그것도 새벽 12시가 넘어 스마트폰으로) 고인을 기리는 멋진 추모사가 아니라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촌스러운 '신파'가 되고 말았다. 귄터 그라스가 눈을 감으며 나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혹은 추억)도 더욱 침잠될 것이다. 


혹시 <양철북>을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다시 읽고 싶어 졌다. 심지어 영화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더 가까운 사이는 되지 못할 것이다. 원래 첫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이 글은 지난 4월 귄터 그라스 부음 소식을 접하고 썼던 글이다.>  

<양철북> 책 표지. 

<귄터 그라스: 1927.10.16~2015.4.13>


1927년 폴란드의 자유시 단치히( 그단스크 )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청년 운동을 겪었고, 열여섯 살에 징집당해 참전했다가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55년 서정시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등단했다. 1958년 첫 소설 <양철북>초고를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적 집단인 ‘ 47년 그룹 ’ 모임에서 낭독해 그해 47년 그룹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뷔히너 상, 폰타네 상,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을 받았다. 1999년 <양철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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