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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02. 2015

지난 여름, 한 권의 책

요 네스뵈의 하드보일드 누아르  <아들>


가끔(아주 가끔) 주변에서 재밌는 책 없냐고 물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요 네스뵈의 작품을 추천한다. 책을 찾아보고 나서 돌아오는 반응의 상당수는 이렇다. “장르소설은 별론데”, “나는 이런 소설 싫어해.”  


밀려오는 무기력감과 막막함.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책을 다 덮고 났을 때의 그 느낌은? 방법이 없다. 그냥 이렇게 말할 뿐이다. “좀 달라.” 


거짓말이다. ‘조금’ 다르지 않다. ‘많이’ 다르다. 뭐가 그렇게 많이 다르냐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하여간 ‘많이’ 다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럴 때 이유를 찾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이 식을 테니까(그 사랑에 빠졌던 이유가 이별의 결정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요 네스뵈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하던 일은 올스톱.

물론 개인적인 주관이다. 사실적인 문장을 즐겨 쓰는 제임스 엘로이나 마이클 코넬리를 더 높이 평가할 수도 있고, 읽는 내내 책에서 핏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레네 코베르뵐이나 피에르 르메트르의 글에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적 게임까지 즐길 수 있는 스티그 라르손이나 길리언 플린을 더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다. 장르소설, 특히 추리소설은 역시 일본 작품이 최고라며 북유럽의 키 큰 소설가(요 네스뵈의 키는 190cm가 넘는단다)를 단숨에 ‘디스’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올 여름 끝자락을 시원하게 보냈다  


그래도 누군가 만약 올 여름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요 네스뵈의 <아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읽은 책도 몇 권 안된다.  그나마 <아들>이 있어 여름의 끝이 훨씬 덜 더웠다. 더위에 지쳐, 밀린 일에 지쳐 여름의 끝을 무기력하게 보낼 때쯤 이 책을 만났다. 그것도 무려 요 네스뵈 사인본을.  

요 네스뵈의 친필 사인본을 받았다. 숫자 '000454'는 454번째 구매자라는 뜻?

요 네스뵈 소설의 매력은 역시 캐릭터다. 그것은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물론 탄탄한 구성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과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몰입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인기가 많은 것은 해리 홀레라는 ‘매력적’인 주인공 형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참혹하게 일반 시민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조차 ‘매력적(착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강렬하다는 의미에 가깝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 <세븐>이 형사 역을 맡은 모건 프리먼과 브래드 피트뿐만 아니라 캐빈 스페이시가 잔인한 연쇄살인범 역을 맡았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히트>가 최고의 하드보일드 누아르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범인을 쫓는 형사가 알 파치노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범인 역을 로버트 드 니로가 맡았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히스 레저와 톰 하디가 악역을 맡지 않았다면 얼마나 맥 빠진 영화가 됐을까?  

해리 홀레 형사가 등장하지 않는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2008년 독립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출간했던 <헤드 헌터>가 요 네스뵈의 소설 답지 않게 다소 맥 빠진 소설로 읽힌 이유는 스토리도 그렇지만 주인공들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가 등장하지 않는 두 번째 요 네스뵈의 소설 <아들>에서는 어느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가장 강렬한 범인을 만날 수 있다. 


◇실타래처럼 얽혔다 풀리는 복수와 용서 


이야기는 오슬로의 감옥에서 시작한다. 이곳의 젊은 죄수 ‘소니 로프투스’가 주인공이다. 소니는 촉망받는 학생이자 운동선수였지만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부패 경찰 혐의로 자살한 후 마약에 의존하며 망가진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부자와 권력자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면서 마약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감옥에서의 삶을 선택한 인물이다.  

<아들>의 표지 이미지. 섬뜩하다. 

하지만 한 동료 죄수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소니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 자신에게 범죄의 누명을 씌웠던 자들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감옥을 탈출해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소설은 시종일관 우울하고 침울하며 서늘하다. 소니의 복수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주저하지 않으며 자비도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로지 복수만을 향해 달려가는 소니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소니를 쫓는 시몬 형사는 해리 홀레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실명한 아내의 눈을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 친구를 죽인 (한때) 냉혈한이기도 하다. 소니와 시몬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복수와 용서, 화해의 여정이 이 책의 주된 스토리다. 소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 복서와 용서가 시종일관 뒤섞여 이야기를 끌어간다. 


◇캐릭터, 그리고 묘사와 대사 


요 네스뵈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잔인할 만큼 차분한 묘사와 대사다. 그런 묘사는 잔인한 살인 현장, 살인 장면을 설명할 때 빛을 발한다. 덤덤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도 숨을 죽이며 읽게 된다. 또 어떤 장면은 주인공들의 대사 만으로도 사건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범인의 잔인한 살해 방법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  

원작 표지와 친필 사인. <사진=출판사 제공>

이런 요 네스뵈 소설 특유의 묘사와 대사는 <아들>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그러더니 다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작고 구부러진 단도를 꺼내 들었지.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가 그 애의 목 앞에서 칼을 휙 휘두르더군. 마치 생선의 배를 따듯이. 목에서 피가 서너 번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멎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한 게 뭔지 알아? 개야. 피를 보고 녀석이 길게 울부짖던 소리.”  p13~14


네스토르는 소니의 탈옥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네스토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무서울 때는 평정심을 잃고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냉정한 상태에서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찾아내. 아니면 못 찾게 하든가.” 네스토르가 말했다.  p122


이상하리만치 순수하고 떨리는 음 하나가 북유럽의 환한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고, 하늘에서는 곤충들이 춤을 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음이 뚝 끊기더니 다른 것이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작고 따뜻한 물방울들이 그의 얼굴에 튀었고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사냥을 하면서 아직 살아 있는 엘크의 정맥을 직접 잘라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p389

야네의 말이 맞았다. 시동을 걸었어야 했다.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삶의 즐거움을 실컫 누렸어야 했다. 걸음을 늦추고 꽃향기를 맡았어야 했다. 너무나도 자명하여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지만 죽음의 문턱에 서기 전에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우리 삶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라는 말을. p525

<아들>  책 표지.

<아들>이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의 프리퀄로 기대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아쉽게도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레드 브레스트>, <네메시스>, <데빌스 스타>로 이어지는 오슬로 3부작과도 무관하다. 오슬로에서는 소설 속 장소들을 탐방하는 ‘해리 홀레 투어’가 실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오슬로의 어두운 치부를 드러낸 <아들>이 그 투어에 포함된다면 어디로 여행객들을 안내할지 궁금하다.  


또 요 네스뵈 얘기냐고 욕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랴. 아마 앞으로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다른 일은 제쳐놔야 할 것 같다. 독일의 <슈피겔>이 이 책에 대해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가장 현대적인 버전”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최근 어떤 친구분도 이 책을 언급했다.  

갑자기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읽고 싶어 졌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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