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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04. 2015

슬픈 실화, '블랙 달리아'

제임스 엘로이 LA 4부작의 시작 <블랙 달리아>

책은 꼬리를 문다. 이 작가의 그 책을 읽으면 저 책도 읽고 싶고, 이 작가의 책을 읽으면 저 작가의 책도 찾게 된다. 이 분야의 책을 보면 그 분야의 다른 책을 검색하고, 또 다른 분야도 찾게 된다. 소설에 꽂히면 당분간은 소설이다. 인문학에 심취하면 다음 책도 인문학이다. 독서는 끝말잇기와도 비슷하다. 


장르소설의 중독성이야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또 장르소설이냐고 욕하지 마시길. 요 네스뵈를 접한 뒤 시작된 장르소설 읽기는 여전히 멈출 줄 모른다. 길리언 플린의 <다크 플레이스>에서 피에르 르메트르의 ‘카미유 형사 시리즈(이렌, 알렉스, 카미유, 로지와 존)’로 시작해 레네 코베르뵐의 ‘니나 보르 시리즈(슈트케이스 속의 소년, 보이지 않는 이웃의 살인자, 나이팅게일의 죽음)’에 이어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 가운데 하나인 <블랙 달리아>까지.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블랙 달리아>의 한 장면.  경찰과 기자들의 표정에서 시신의 참혹함을 엿볼 수 있다.


아쉽게도 국내에 출간된 LA 4부작은 <블랙 달리아>와 <LA 컨피덴셜> 두 권뿐이다. <블랙 달리아>를 읽었으니 <LA 컨피덴셜>도 읽지 않을 수 없다. 이 와중에 SNS을 통해 한 분이 존 버든의 ‘데이브 거니 시리즈(658 우연히, 악녀를 위한 밤)’를 추천해주었으니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 그래서 불가피하게 올해 나의 장르소설, ‘하드보일드 누아르’ 읽기는 아무래도 계속될 것 같다. 


덕분에 주문만 해놓고 책꽂이 한편에 쌓아놓은 유시민과 정여울, 진중권, 이언 매큐언 등등의 책은 속절없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해놓고 매번 미루기만 하니 책 주인(책 주인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견해)의 무심함을 탓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첫 장을 펴자마자 마지막 장을 덮지 않고 못 배기는 책을 더 이상 만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는 사실 영화 <LA 컨피덴셜> 원작자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구입했던 책이다. 제임스 엘로이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소설의 배경이자 실제 사건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도 몰랐다. 더구나 <블랙 달리아>도 이미 오래전 영화화됐었다는 사실도 책을 읽고 난 뒤 처음 알았다(맙소사, 더구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조쉬 하트넷과 스칼렛 요한슨 주연이었다니).


제임스 엘로이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국내에 많이 번역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의 신작이 번역되면 당장 사서 보게 될 같다는 것이다. 


소설 <블랙 달리아>의 실제 모델이 된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 사건 사진.


◇실화,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 

  

1947년 LA의 한 공원에서 여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쇼트(1924년 7월 29일~1947년 1월 15일경). 시신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허리가 잘려서 상반신과 하반신은 분리되었고, 피는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빠져나가 있었다. 얼굴도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쇼트의 입은 귀까지 찢어져 소위 ‘글래스고 스마일’이 되었다. 목격자는 처음에 마네킹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자 언론이 들끓었다. 범죄 사건에 별명을 붙이기 좋아하던 신문들은 그녀를 ‘블랙 달리아(Black Dahlia)’라고 불렀다. 선정적인 사진과 제목, 기사로 이 사건을 이슈화했다. 쇼트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을 때 입었던 검은 양복은 ‘타이트한 스커트와 쉬어 블라우스’로 둔갑했고, 엘리자베스 쇼트는 ‘할리우드 대로를 배회하던 여모험자’, ‘블랙 달리아’가 되었다.   


소설 <블랙 달리아>, 그리고


◇소설, <블랙 달리아>


<블랙 달리아>는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 첫 편이다. 저자는 어릴 적 어머니가 비극적으로 살해되면서 ‘블랙 달리아’ 사건으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쇼트 살해 사건에 탐닉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탄생한 작품이 <블랙 달리아>(1987)이다. 이어 <The Big Nowhere>(1988), <LA 컨피덴셜>(1990), <White Jazz>(1992)로 이어지는 LA 4부작을 완성했다. 국내에는 <블랙 달리아>와 <LA 컨피덴셜> 2개 작품만 번역됐다.


소설은 실화 그대로다. 1947년 LA, 한 무명 여배우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대도시를 충격에 빠뜨린다. 예리하게 두 동강 난 시체는 피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사체의 입술은 양 귀 쪽으로 찢어져 있었다. 너무나 잔인해 절대 비밀에 부쳤던 일명 ‘블랙 달리아’ 사건은 결국 언론에 의해 대중에 공개되고 사회는 더욱 공포에 휩싸인다.   


경찰청 권투경기로 인해 당시 최고 기관인 수사대에 입성하게 된 스타 복싱선수 출신 형사 벅키와 리는 블랙 달리아 사건에 긴급 투입된다. 열정적인 두 형사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방식대로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하고 뜻밖에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사건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개인적인 수사를 펼치던 리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게 되고, 벅키는 리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수수께끼와 직면한다.   


영화 <블랙 달리아>.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단지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말로서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통해서만 그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다. 난 과거를 회고하고 사실을 수집하여 그녀를 재구성해 냈다. 그녀는 슬프고도 귀여운 여자였고 또 창녀였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야 ‘잘 나갈 뻔하다가 샛길로 빠져 버린’ 여자였다. 어쩌면 그런 표현은 내게도 똑같이 적용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보스턴이 가까워지자 비행기는 구름에 휩싸였다. 나는 공포로 몸이 무거워졌다. 케이와의 재회와 2세의 탄생으로 인한 아버지 노릇은, 나를 빠르게 추락하는 무거운 돌덩이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베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소원을, 아니 기원을 말했다. 그러자 구름이 갈라지면서 비행기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내 눈 아래로는 황혼 녘의 밝고 거대한 도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베티에게 이렇게 기원했다. 너에게 바친 내 사랑의 대가로 내게 안전한 비행(飛行)을 보장해 달라고.” 

영화 . 


◇영화, '블랙 달리아', 그리고 ‘LA 컨피덴셜’   


제임스 엘로이의 많은 작품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됐다. 하지만 각색과 연출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부분 호평을 받지 못 했다. ‘블랙 달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영화는 화려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주인공 벅키 역은 조쉬 하트넷이 맡았다. 그리고 그의 동료 리 블랜차드 역에는 아론 에크하트, 연인 케이 역은 스칼렛 요한슨이 열연했다. 이후 1997년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된 <LA 컨피덴셜>은 클래식 누아르의 걸작 반열에 오르며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그 해 수많은 영화상을 휩쓸었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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