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에 대한 과학적 고찰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
TV 리모컨에는 발이 달려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 전에 사용했던 리모컨이 그렇게 사라질 이유가 없다. 더구나 리모컨은 매번 '그곳'에 두지 않았던가.
사라진 리모컨 찾기. 누구나 심심치 않게 겪는 경험이다(한 달 만에 찾았다는 사람을 알고 있다. 물론 리모컨은 멀리 가지 않았다. 거실에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는 또 어떤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누르는 번호인데도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도저히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외출 중인 부인한테 전화를 했다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는 40대다).
과학자들이 누군가. 이런 문제를 그냥 둘 리 없다. 많은 연구원들이 '냉장고 속 맥주'로 잘 알려진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찾을 때 우리는 특정 선반부터 눈여겨본다. 맥주가 늘 그 선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주가 있던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놓여 있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맥주를 찾아 냉장고를 헤매게 된다. 리모컨을 잃어버리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는 실수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당연히 그 번호일 것이라는 우리의 게으른 인식 작용이 우리를 '순간 바보'로 만든다.
요 네스뵈의 소설을 좋아한다. '스칸디나비아 스릴러'라는 장르명이 붙은 그의 소설에는 매번 '해리 홀레'라는 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형사는 사건 현장을 살펴볼 때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무엇인가 찾겠다는 목표가 뚜렷하면 오히려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이 없던 소설 속 해리 형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사람이 왜 실수를 하는지. 다음번에 리모컨이 또 사라지면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소파 주변과 거실을 살펴볼 일이다.
이런 실수는 애교에 가깝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가장 단적인 사례는 투표 행위에서 목격된다. 후보들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할 경우 많은 사람들은 후보의 얼굴만을 보고 이미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결정한다.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실제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더 심각한 사실은 이런 결정이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지 않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을 보고 그들의 능력을 추측한 시간은 고작 '1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짧게는 4~5년, 길게는 수십 년의 정책을 좌우할지도 모를 중요한 투표에서 우리는 '1초의 결정'을 맹신하는 실수를 범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이 만든 실수의 세계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의 저자 조지프 핼러닌은 지난 1991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의료과실을 연속 보도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는 20년 동안의 실수담을 모았다. 그리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에게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눈은 스스로를 속이고, 이야기는 거듭할수록 내용이 달라지며, 무엇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이 지닌 근본적 결함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인간이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실수의 원인을 파헤친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의 상당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은 주변 세계를 보고 기억하고 인지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구조적 편향(sysmetic biases)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구조적 편향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책은 일단 이러한 위로의 말로 시작한다. 그 구조적 편향은 우선 '과신'이다. 과신은 무엇이든 대충 훑어보게 만든다.
피아노 연주자인 보리스 골도프스키가 오래전에 이 사실을 입증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던 그는 제자 한 명이 브람스의 곡을 엉터리로 연주하자 당장 연습을 중지시키고 실수를 바로잡으라고 지시했다. 제자는 어리둥절했다. 악보대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골도프스키가 다시 살펴보니 제자의 말이 옳았다. 악보 인쇄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한 가지 실험을 계획했다. 숙련된 전문가들에게도 똑같이 악보를 보여주고 연주를 하도록 한 것. 그런데 어느 누구도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 했다.
초보자는 알지만 전문가는 모르는 '골도프스키 실수'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2008년 4월 NASA에서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가능성을 예측했을 때 계산상의 오류를 지적한 주인공은 13세의 학생이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27년이나 몰랐던 전시 상의 실수를 5학년 학생이 발견했다. 앞서 러시아 국영방송에서는 북극으로 항해를 떠난 러시아 잠수함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 영상은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 누구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한 초등학생이 그 영상은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언론사에 제보했다.
업무의 특성상 오탈자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흥미롭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 눈에는 애초에 보려 했던 것만 보인다. 그리고 세부 요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로지 패턴만을 인식하게 된다."
◆실수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값비싼 대가
무엇보다 실수의 가장 큰 원인은 '소통 단절'이다. 일방적이거나 굴절된 소통은 치명적 실수를 낳는다.
저자는 군대와 병원에서 이와 관련된 극단적 사례를 발견했다. 1950년대 미국 해군의 항공기 사고는 10만 비행시간당 50건에 달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1.5건으로 줄었다. 기장과 부기장, 항법사의 의사소통을 제도화한 것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이든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직급에 관계없이 즉각 보고하도록 했다. 실제 벌어지지 않은 잠재적 실수까지 공동책임을 물었다.
반면 영국 임페리얼대 연구진의 연구 결과, 병원은 1930년대 이후 오진 비율에 변화가 없었다. 실제 영국이나 미국의 병원에서도 오른쪽 왼쪽 신체 부위를 잘못 수술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많이 발생했다. 검진이나 수술 과정 등에서 수련의가 문제를 제기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 분위기가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수를 없애는 방법은 없다. 그래도 줄일 수는 있다. 저자는 실수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보통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 속의 다양한 사례는 결국 실수가 '나는 완벽하다', '나는 평균 이상의 사람이다'라는 오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오만은 '나는 특별하다'거나 '상대방이 틀렸다(사실은 다른 것에 불과한데도)'는 편견을 부른다. 실수는 오만과 편견의 값비싼 대가인 셈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만 바라보는 편향성,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자기 과신, 대충 보고 간과하는 습관,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멀티태스킹의 신화가 실수를 부른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연대(혹은 소통)' 뿐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과신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로의 말로 시작했던 책은 이런 충고도 잊지 않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책임을 엉뚱한 대상에 돌리기 때문이다.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면 실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소통하라, 그리고 끊임없이 피드백하라!"
by 책방아저씨 http://goo.gl/gkrk2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