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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19. 2015

당신의 '종이달'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관하여, <종이달>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랑은 이기적인 사람이 더 잘한다고.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됐다.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이타적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내가 얼마나 잘 해주느냐’로 성패가 갈린다고 생각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면 ‘내가 잘 못해줘서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 슬픈 일이지만 아무리 잘해줘도(잘해줄수록) 상대는 늘 떠나기 마련이다.


전제가 잘못됐다. 내가 얼마나 잘 해주느냐가 아니라 ‘나한테 얼마나 잘 해주느냐’가 관건이다. 나와, 나의 즐거움과, 나의 욕망과, 심지어 나의 슬픔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사랑, 그게 오래간다. 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 사랑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것이 ‘나’라는 존재임을 알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나는, 늘 누군가에게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래서 또 사랑을 만난다. 사랑은 결국 이기적인 사람이 더 잘한다.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은 마흔이 넘도록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 했던 한 여자가 자기의 욕망을 사랑하게 되면서 빚어지는 비극을 다룬 이야기다. 41세의 우메자와 리카는 여느 주부와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 소개란의 설명처럼 그녀는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성장해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주부다. 


여고시절 친구인 유코는 리카를 ‘갓 쓰기 시작한 청초함을 지닌 정의로운 소녀’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 전 애인이었던 가즈키에게 리카는 ‘욕심 없고 자기만의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성’이었으며, 요리교실 친구였던 주조 야키에게는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꿈과 욕망을 모두 실현했지만 리카의 모습은 왠지 불안하다.


그래서 어느 날 리카가 1억 엔의 은행돈을 횡령하고 달아났다는 뉴스를 접하자 다들 놀라워한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평범하고 청초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긴 걸까? 그들이 봤던 리카의 모습이 진짜일까, 1억 엔의 돈을 횡령하고 달아난 리카의 모습이 진짜일까? 


리카가 관리하던 VIP 고객의 손자, 히라바야시 고타를 만나며 리카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부유한 할아버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고학생 고타를 위해 리카는 모든 것을 바친다. 50만 엔, 100만 엔으로 시작한 횡령은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리카도 점점 대범해진다. 맨션을 구해(당연히 횡령한 돈으로) 그들만을 위한 아지트를 만들고 점점 더 격렬한 욕망의 동굴로 들어간다. 그것이 사랑이라 믿으며.  



◇그들은 믿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꿈과 욕망을 쫓아 범죄와 일탈에 빠져들어가는 주부의 내면세계를 추리물처럼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이 높게 평가받은 것은 너무도 통속적인 얘기를 너무도 통속적이지 않게 다뤘기 때문인 것 같다. 성실한 한 은행 직원이 있다. 아무도 몰랐는데 그동안 수십억 원의 돈을 횡령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가정까지 포기하고 달아났지만 결국 잡히고 돈의 용처도 모두 드러난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젊은 애인이 있었다. 


통속적이다 못해 저속하게 들릴 수 있는 이런 스토리는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도 소설 속 리카는 통속적인 인물로 읽히지 않는다(누군가 말한 것처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마치 나에게만 일어났던 일로 쓰는 것이 소설가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영화 <종이달>의 한 장면.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리카는 어린 남자 고타를 만나며 그야말로 꿈길을 걷는 듯한 경험을 한다. 꿈에서나 그렸던(꿈에서조차 그리지 못했던) 일들과 수시로 마주한다. 하지만 리카와 고타의 관계는 정점을 향해 간다. 그것은 호텔 스위트룸을 얻어(물론 횡령한 돈으로) 일주일 동안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대목이 가장 불안했다.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 순간, 그렇게 정점의 순간을 찍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의 리카와 고타도 그것을 직감한다.  


꿈같아요.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맞은편에 앉은 고타가 말했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보다 좋은 것을 꿈이라고 단정 지을까. 어째서 이쪽이 현실이고, 내일 돌아갈 곳이 현실보다 비참한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고 “마지막이라는 건 없어.” 고타에게 웃어 보이며 잔에 남은 샴페인을 마저 마셨다.


리타에게 고타는 자신의 꿈과 욕망이었다. 그 꿈과 욕망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돈을 횡령하는 일, 그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리타는 슬프게도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잘 해주면, 모든 것을 해주면, 심지어 내 모든 것을 포기하면, 그 사람이 영원히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40대의 주부가 20세의 남자와(성별을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계속 끈을 유지하고, 꿈과 욕망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의 가장 행복한 순간 '종이달'


제목 <종이달>은 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일본에 사진관이 처음 생겼을 무렵,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종이달'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한다. 


언젠가 제주도 출장길에 마지막 부분을 읽고 이 책을 덮었다. 정말로 바다가 안 보이는 종달리의 카페 ‘바다는 안 보여요’에서 책을 덮고 나와 담배를 물었다. 문득 내 인생에서 ‘종이달’이 떴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렸다. 나의 꿈과 욕망도 안녕하지 못 했을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비행기 시간은 여유가 있었지만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소설도 끝났고, 짧은 출장 일정도 끝났고, 무엇보다 ‘종이달’이 다시 뜨는 날도 없을 것이다.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소설은 거액을 횡령하고 태국에서 도망 중인 주인공 리카의 이 대사로 막을 내린다. 그녀를 떠나며 고타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리카는 그때 묻고 싶었다. 여기라니, 어디? 하지만 리카는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고타에게 도저히 그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애인이었던 남자가 떠나며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이제는 자신이 여권을 요구하는 (경찰로 보이는) 태국 남자에게 똑같이 한 것이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이제 우리가 리카에게 질문을 할 차례다. “여기라니, 어디?” 그리고 자문할 때다. “나의 꿈과 욕망은 안녕한가?” 


by 책방아저씨 www.facebook.com/booksbooster


<종이달>을 출장길에 들렀던 제주의 한 카페에서 마저 읽었다.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은 2014년 NHK 드라마로 방영된 데 이어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되어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는 올여름에 개봉했다(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다). 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가 새벽 무렵 기찻길 옆에서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어쩌면 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의 ‘종이달’이 아니라 현실의 ‘달’. 가쿠다 미쓰요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작가 중 한 명이다. 기회가 되면 그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참이다.




◆내가 밑줄 친 문장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갖고 사방으로 튀는 빚과 소음 속을 걷다 보면, 리카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흥분을 느꼈다.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원하는 것은 모두 이미 이 손에 있어. p11

"처음 만났을 때, 좋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고타는 말하고, 카운터 안쪽에 있는 몸이 마른 점원에게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고타의 귓불이 빨갛다. 리카는 황급히 진토닉 잔을 뺨에 갖다 댔다. 놀라울 만큼 뺨이 뜨거웠다. p123

리카의 생활은 그날을 경계로 달라졌다. 그때는 그렇게 뚜렷이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돌이켜 보면 확실히 그날 아침 이후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변화의 계기는 고타와의 섹스가 아니라, 그날 아침의 정체 모를 만능 감이었던 것 같다. p156

황금연휴에 머물렀을 때와 똑같은 방에서 룸서비스로 와인을 마시고, 스테이크를 써는 것도 잊고, 고타는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에 관해, 음식에 관해, 처음으로 혼자 간 여행에 관해, 그리고 영화에 관해 정신없이 얘기했다. 열흘 동안의 진부한 상상과, 불안과 비슷한 술렁거림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리카는 고타를 바라보며 맞장구쳤다. 리카가 기억하는 한, 고타가 처음 만났을 무렵과 똑같이 눈을 반짝거리며 영황 관해 얘기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p263

"리카 씨, 미안해요.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고타는 무릎을 세우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조그맣게 흔들렸다. 어째서 웃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부탁이에요." p315

가자, 이다음으로. 리카는 생각했다. 이다음에 미지의 내가 있다. 끝까지 도망치면 나는 더 새로운 나를 만난다. 그러니까 가자. 어차피 도망쳤다. 더 멀리 도망치면 된다.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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