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방문記
오전 10시.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을 열기 전 헌책방 골목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된, 비좁은, 황량한 책방 ‘골목’일뿐이다. 하지만 서점들이 문을 열고 서점의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곳이 된다. 책을 진열하자 좁은 골목은 더욱 좁아졌지만 비로소 ‘책방’ 골목이 됐다. ‘책방’과 ‘골목’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결국 책이다.
책방과 골목을 이어주는 또 하나, 사람들이다. 책 없는 책방골목이 그저 골목에 불과한 것처럼 사람 없는 책방골목도 마찬가지다.
문을 열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휴일을 맞아 ‘구경’ 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구경만 하지 정작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상인들이 울상이라는 기사를 얼마 전 본 적이 있다. 책을 사는 사람보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곳. 보수동 책방골목의 비애(悲哀)다.
마음의 짐을 덜고자 인터넷에서 주문하려던 <송곳>을 이곳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만화책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서점 한 곳에 들어갔다. 다른 지역에서 온 한 가족이 책을 찾고 있었다. <슬랭 덩크> 시리즈. 충북에 있는 친척이 부산 가는 길에 이 책을 구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단다. 가격 흥정이 이루어지는데 에누리가 별로 없다. 책값은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택배비 3천 원은 별도다.
이 정도면 매출이 하루 시작이 괜찮고 서점 주인의 기분도 좋을 것 같아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 <송곳> 3권을 찾아 가격 흥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흥정은 원만하지 못 했다. 새 책 가격에서 10% 할인. “그건 인터넷하고 같다."라고 하자 서점 아저씨는 서운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인터넷 때문에 아주 죽겠어. 15% 싸게 해 줄께.” 더 이상 깎지 못 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이 형성된 지 수십 년이 됐겠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와 본 것은 불과 5년 전이다.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보러 왔었고, 영화가 비는 시간 잠시 이곳을 들렀다. 그 후부터 부산에 오면 꼭 이곳을 들른다. 책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구경꾼일 때가 더 많았다.
검색해보니 부산의 한 신문에 실린 보수동 책방골목 1세대 서점 김여만 학우서림 대표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노점으로 시작해 이곳에서 60년 넘게 서점을 운영했단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을 안 사도 단골들이 책방에 와서 책을 뒤적이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책 살 돈이 없던 한 동아대 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아침마다 출근하듯 와서 책을 보다가 점심 먹고 와서 저녁 6시까지 보고 갔는데 밉지 않았어요. 또 단골 중 타 지방에 살다가 한 번씩 찾아와 '아직도 책방 하십니까' 하며 추억을 이야기할 때 행복합니다."
지금도 그런 손님이 있을까? 그렇게 아침부터 와서 저녁까지 책을 읽는 대학생이 있을까? 지금도 누군가 와서 하루 종일 책만 뒤적여도 서점 주인은 즐거울까? 잘 모르겠다.
마침 책방골목 축제 기간이었다. 축제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골목길에 마련된 자판에서 이런저런 참가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 부산시민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는 시도일 것이다. 책방골목 중간에 있는 계단도, 도넛 가게도, 카페 골목도 그대로다. 책방은 조금 줄거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카페는 1~2곳이 더 늘어난 것 같다. 책을 구입하고 도넛을 몇 개 사서 골목에 있는 카페에 들러 잠시 쉬는 것이 이곳에서의 정해진 코스였다.
매번 가던 카페에서 책을 조금이라도 읽다가 갔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 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주차위반 단속 중이라는 인근 상인의 ‘제보 전화’였다. 타지에서 차가 견인되면 낭패인지라 허겁지겁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차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차위반 스티커가 앞 유리에 붙어 있었다. 비교적 차가 덜 다니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곳에 차를 세웠는데 너무 야속했다.
망설이다 차를 타고 보수동 책방골목을 떠났다. 여기까지 차를 끌고 온 내가 잘못이다. 아쉬웠지만 그렇게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매번 들르던 카페에 가면 쓸데없는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온다. 책장을 넘기지만 쓸데없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한순간. 매출에 조금이라도 기여해주지 못해 카페 주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나게 해 준 주차단속원이 차라리 고맙다.
내년 이맘때도 부산에 오게 될 것이다. 그 전에라도 부산에 오게 되면 또 이곳을 들르게 될 것이다. 다음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올 때는 차를 놓고 와야겠다. 그리고 그 카페는 가지 말아야겠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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