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고른 '올해의 (읽은) 책'
누가 그랬다. 우리가 평생 책 읽는 시간에 투자하는 시간은 평균 10개월이라고.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10.2권이다. 한 달에 한 권도 채 읽지 못하는 셈이다.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1년 동안 읽은 책을 헤아려 봤다. 쌓아놓고 사진도 찍었다. 언젠가부터 하지 않는다. 1년에 아무리 많아야 50권 넘기기 어렵더라. 게다가 그 숫자도 해마다 줄어들더라. 무엇보다 책 몇 권 읽었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겠더라.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책은 도끼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도끼'같은 책이 있었다고는 말 못했겠다. 책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문제다. 읽는다고 읽었지만, '내 안에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릴' 정도로 체화하지 못한 것이다. '내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잠에서 깰 만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책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다.
그래도 생각나는 책 몇 권이 있다. '도끼'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왜 책을 읽는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중한 책들이다. 올해 처음 읽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책들이다. 올 한 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 다섯 권을 꼽아봤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다분히 주관적인 데다 내 마음대로 선정한 것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 목록에 있더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시길.
◇칼 세이건 <코스모스>
올 한 해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코스모스>를 읽은 것이라고. 또 길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나의 독서 인생(특히 교양서적)은 <코스모스>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이제야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이 부끄럽고 후회될 뿐이다. <코스모스>를 읽었던 6월 한 달은 행복했다. 올해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완독할 생각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코스모스>도 그렇지만 <총, 균, 쇠>도 이제야 읽었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허물이다. 그래도 스스로 대견하다. <코스모스>를 읽고 내친김에 교양과학 고전에 도전해보겠다고 마음먹고 덤볐던 책이다. 꼭 한 달이 걸렸다. 반은 의무감으로 시작했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 책이다. <코스모스>보다는 감동이 덜했지만, 왜 이런 책들이 필독서로 불리는지 알게 됐다. 돌아보니 다시 한 번 대견하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솔직히 믿지 않았다. 책을 덮는 순간 다시 첫 페이지를 펴게 된다는 말을.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렇게 됐다. 외국 소설을 이렇게 심취해 읽은 것은 밀렌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후 처음이다. 사랑과 질투, 저주와 운명의 변증법을 이렇게 재치 있게 다룬 소설을 만난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돈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요 네스뵈 <데빌스 스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 10권 가운데 다섯 번째 작품이자 <레드 브레스트>와 <네미시스>에 이은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요넵 형님의 소설은 아주 추운 겨울, 혹은 아주 더운 여름에 읽어야 제격이지만 이 책은 꽃 피는 봄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요넵 형님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추천하지만, 이제는 지쳤다. 읽든지 말든지. 그나저나 다음 소설은 언제 나오는 건지, 찔끔찔끔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가 야속할 뿐이다.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이 책은 아주 실용적인 면에서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글 쓰는 일에 더 큰 용기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다.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답은 단순한데 이 단순한 사실을 자꾸 잊는다. 한 줄 조차 쓰기 싫을 때쯤 이 책을 읽었고, 이때부터 거의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물론 오래가지 못했지만). 또 지칠 때쯤 이 책을 펴볼 생각이다.
첫째, 많이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읽을수록 더 잘 쓸 수 있다.
둘째,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책으로 숨는 버릇이 있다. 책을 펴들고(읽은 안 읽든) 있으면 그런 문제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무엇보다 이럴 때 더 정독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하니라 문제를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니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좋은 버릇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는 즐거울 때, 더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기를 소망한다. 로쟈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