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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13. 2016

"독서는 오만과의 투쟁"

우리는 왜 읽고 쓰는가…김영하의 산문 3부작 보다, 말하다, 읽다

우리가 익히 아는 책 속의 인물들은 의외로 다독가(多讀家)들이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에서 등장하는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에 ‘꽂힌’ 인물이다. 불현듯 생각나면 책꽂이에서 이 책의 아무 페이지를 펼쳐 읽을 정도였다. 나가사와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 그 부분을 집중해서 읽곤 했는데,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페이지도 재미없는 페이지는 없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 주인공 에마 보바리는 책을 읽고 낭만적인 삶을 꿈꾼 인물이다. 수도원에서 읽은 낭만적 소석에 푹 빠져 시골에서의 진부한 삶이 아니라 극적이고 화려한 삶을 동경한다. 흰 깃털로 장식한 기사가 검정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에마 보바리다. “열다섯 살 때 에마는 여섯 달 동안 낡은 도서대여점 책 먼지로 손을 더럽혔다. 그 후 월터 스콧을 읽고는 역사물에 열중하여 궤짝, 위병 대기소, 음유시인 따위를 동경했다.”      


작가 김영하. <사진=씨네 21>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또 어떤가. 무모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을 모조리 읽고, 그 책 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착각했던 인물이다.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에 돌진하는 ‘미친 기사’이기 전에 그는 ‘책에 미친 자’였던 것이다.  “결국 그 양반(돈키호테)은 독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밤이면 밤마다 날이 훤히 샐 때까지, 낮이면 낮마다 밤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책만 읽었는데, 잠은 안 자고 책만 읽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왜 읽는가?  


<노르웨이 숲>의 나가사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돈키호테>의 돈키호테에서 우리는 ‘왜 읽는가’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자신의 산문 <읽다>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책을 읽은 것처럼, 우리도 이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책들의 주인공이 책을 읽는 것과 우리가 책을 읽는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 들어가길 바라고, 그들이 되길 원한다. 그래서 책 읽는 우리는 어쩌면 에마 보바리이자 돈키호테일 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산문 3부작. <보다>, <말하다>, <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읽다>는 김영하의 산문 3부작의 완결 편이다. <보다>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도 유머러스한 통찰을 보여준 작가는 <말하다>에서 작가의 말하는 방식, 다시 말해 글쓰기의 원리를 들려주더니 <읽다>를 통해 ‘우리는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읽는가? 독서는 왜 하는가? 김영하는 답한다.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 이겼던 고전 


작가가 ‘독서는 왜 하는가’의 답을 찾기 위해 찾아든 카드는 역시 고전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반전에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이 어떤 비극으로 끝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면서 그 옛날 소포클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오만에 대한 경고음을 듣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오이디푸스 왕.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과의 투쟁"이라고 말하는 작가 김영하. <사진=출판사>


김영하가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과의 투쟁'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돈키호테, 에마 보바리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이런 교훈을 계속 전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특히 고전을 읽는 이유는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쓰는가?  


작가는 전작 <말하다>에서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김영하라는 작가를 다시 보게 한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 작가와 독자의 소통법. 소설가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김영하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김영하가 말하고자 하는 글쓰기는 내 삶의 자유를 위한 글쓰기다. 누가 읽지 않아도, 혹평이 쏟아져도, 설사 글 한 줄 쓰기 힘든 엄중한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의 즐거움과 자유를 위한 글쓰기. 그리고 글쓰기는 살아있다는 유력한 증거물이다. 살아 있는 한 그들은 썼고, 쓰는 순간 그들은 살아 있었다.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다>에 수록된 삽화. 


작가는 묻는다.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에서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게 될까? 쓰지 못하는 삶보다는 읽지 못하는 고통이 더 클 것 같다고 그는 답한다.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계속 읽고 쓰게 될 것이다.  


<말하다>에서 작가가 말한 이 문장을 기억한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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