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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an 17. 2016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

내가 읽고 밑줄 그었던 신영복 선생의 책과 문장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기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지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 만 느끼게 합니다."


신영복 선생이 1985년 8월 '계수시께' 쓴 편지의 일부다. 감옥 생활을 책이나 영화로만 접한 사람으로서 여름의 감옥 생활 고통을 어찌 알겠냐만은 막연히 '혹시라도 내가 감옥을 갈 일이 생기거든 여름보다는 겨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여름을(그리고 겨울을) 스무 번이나 감옥에서 보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고통을 글과 편지로 견뎌낸 시간의 기록이다. 


신영복 선생이 지난 15일 눈을 감았다. <사진 출처=한겨레>


감옥에서 신영복 선생이 자주 한 걱정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었다.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 '동물적 본능'이었다. 그래서 그는 겨울의 감옥살이와 여름의 감옥살이를 자주 언급했다. 1981년 부모님께 쓴 편지에도 이렇게 적었다.


"겨울 동안은 서로의 체온이 옆 사람을 도와 혹한을 견디던 저희들이 이제 여름에는 자기의 체온으로 옆 사람을 불 때는 형국이 되어 물것들의 등쌀에 더하여 당찮은 미움까지 만들어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읽고 썼다. 그리고 사람과 사회와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창백한 관념'을 반성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성찰의 기록이다. 매달 한 번씩만 필기구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는 한 달 내내 가다듬은 문장을 정리해 가족에게 부쳤다. 그때의 편지글을 신영복 선생은 <담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편지가 검열을 거쳤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편지를 검열하기 전에 자기 검열을 통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다."


신영복 선생은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진 출처=돌베개)


숱한 재소자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사형수로 감옥에 들어간 스물일곱의 청년이 마흔일곱의 장년까지 버티게 한 힘은 한줄기 '햇볕'이었다. 그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이어 읽은 책은 <나무야 나무야>. 전작이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였다면 이 책은 우리 땅으로부터의 편지였다. 20년 징역살이와 7년의 칩거 후에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얼음골이었다. 소설 <동의보감>에서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게 한 바로 그곳이다. 얼음골에서 신영복 선생은 다시 한 번 '삶으로서의 깨달음'을 강조한다. 


"화사한 언어의 요설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앞뒤 좌우에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서 깨닫고, 삶으로써 가르칠 뿐이라 믿습니다. 여느 해보다 청명하고 길었던 가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등 뒤에 겨울을 데리고 있어서 가을을 즐기지 못한다던 당신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 책장에도 그의 오래된 책 몇 권이 있다.


태백산맥 속 소광리 소나무 숲에서는 이런 엽서를 띄운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모악산에서는 미륵의 좌절과 미완의 역사를 아파한다. 그 미완의 의미를 이렇게 되새긴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易經)의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 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掛辭)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너갔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잠시 상념에 젖었던 저자는 결국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끝과 시작, 그리고 그것을 잇는 시대정신을 강조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석양을 통해 결국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은 '깨어 있는 정신'의 영속이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다신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약속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가 직접 고안한 서체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겻다. 


그리고 세 번째 책은 <더불어 숲>이었다. '새로운 세기의 길목에서 띄우는 신영복의 해외 엽서'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세계 곳곳에서 쓴 편지다. 아우슈비츠의 현장에서 그는 단죄와 용서, 사과와 화해를 생각한다. 그때도 이런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책임짐으로써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입니다.


어느 곳에서든 언제든 신영복 선생이 늘 강조한 것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삶이었다. '나무가 나무에게'는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의 다른 제목이었고, '더불어 숲'은 '더불어 사람'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마지막 저서 <담론>에서 그가 남긴 말처럼 우리는 그의 텍스트를 언제나 읽을 것이고 기억할 것이다. 필자는 죽었지만 그의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할 것이다. 끝으로 신영복 선생은 생전에 이 문장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추신:아직 읽지 못한 <강의>, <담론> 등 신영복 선생의 다른 책도 서둘러 읽어야겠다. 더 일찍 읽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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