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힘들때마다 떠나는 여행기 - 퇴사여행 1일차에 기록, 제주도 동쪽
“그리하여 저는, 이곳에 답을 찾으러 왔습니다.”
게스트하우스 필사 모임에서 처음으로 입을 떼며 말했다. 저녁 8시. 올레길을 하루종일 걸은 나는 걸음 수 삼만 보라는 신기록을 찍고 사실 녹초가 된 상태였다. 라식을 하고 깨달은 건데 시력은 컨디션에 따라 보이는 정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날은 무슨, 집중해야 하는데 계속 시야가 흐려져서 여러 번이나 눈을 깜박거려야만 했다.
나는 침침해진 눈을 애써 뜨며 주섬주섬 내가 쓴 노트의 필사한 부분을 내려다봤다. 사실,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낯을 무척이나 가리는 나는 내 차례가 되기 전까지도 처음 뵙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속으로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윽고 내 차례가 되니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속마음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내심 놀란 상태였다. 우습게도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여기온 진짜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로봇처럼 말하고 다닌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방금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곳에 내 나름의 답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영화 독전의 대사를 아시나요.”
나는 살짝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첫 만남부터 욕이라니
“독전에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무엇인가를 존나게 쫓다 보면 말이야, 어떤 신념 같은 게 생기거든.’ (물론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따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성대모사 욕구가 샘솟는 나는 그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마저 입을 떼었다.
“사실 제가 요즘 이런 상태였습니다. 유학을 가서, 모험을 하고, 성장을 하고, 다양한 세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나누며 성장하고 싶다는 꿈을 너무 어릴 때부터 가져서요. 요즘에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왜 그런 꿈을 가졌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꿈에 메인 사람처럼요. “
왜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잃어버릴 만큼 오래된 꿈은 참 무섭다.
내가 어떠한 장면을 열망하고 있다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알 고 있었다. 그게 왜 내 열망이 되었는지를 어느 순간 잊어버렸을 뿐.
“그 물음에 답을 찾고자, 저는 이 책을 필사했습니다.”
나는 내가 적은 책의 인상 깊은 글귀들을 읽어나갔다. ‘서른 즈음에’ 같은 제목의 에세이였던 것 같은데 막상 다시 떠오르려니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서른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가 정의하고 있던 서른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필사를 하면서도 나에게 생각의 실마리는 주었지만 답을 주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답을 주는 책을 만나는 확률보다 내가 그 답을 찾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 역시도. 제주에 와서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버리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용기를 얻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등불처럼.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등불이 있으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으니까. 늘 그 자그마한 안심이 우리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다. 첫 발자국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정 위로 발걸음을 떼어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자그마한 용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백하건대 나는 삶이 힘들 때마다 제주도로 훌쩍 떠나는 병이 있다. 사는 게 조금 힘들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면 나는 항상 제주도 올레길을 선택하고는 했다. 사실 제주도 말고 다른 좋은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은 몇 해 전에 강력사건이 있었기도 하고 더욱이 요즘에는 들개도 많이 늘어서 (친구가 진지하게 말하며 나에게 겁을 준 대사이다) 예전에 인기만큼은 찾아볼 수 없어졌지만, 걷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분명히 한 번쯤은 고려해 보았을 선택지다. 바다와 함께하는 여행. 물론 막상 걸으면 낭만보다는 불편한 게 훨씬 많은 제주여행이지만, 그 불편함 속에 매력이 있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맛있은 것도 맛 없지도 않은 애매한 음식인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생각이 나는 어느 한 식당처럼. 그 미묘하고도 복잡한 매력.
제주는 잘 닦여진 곳만 방문한다면 너무나도 쉽고 편리한 곳이지만, 그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옛 제주의 풍경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이다. 살기에는 조금 척박한 땅. 너무나 덥고, 너무나 습하고, 비는 스프레이처럼 온다. 날씨는 오락가락, 책상은 끈적하고 베개는 꿉꿉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섭도록 잘 닦여진, 그리고 또 무섭도록 덜 닦여진 그 길 사이사이에서 제주의 매력이 나온다. 도시면서 시골이고, 산이면서 바다인 이곳은 지루할 틈이 없다. 올레길 여행은 한마디로 코스요리이다. 줄줄이 이어진 요리들이 오감을 만족시킨다. 가끔은 너무나 험한 산길을 걸어야만 해서 (심지어 택시도 잘 안 잡힐 것 같은 엄한 산길이나 바닷길일 때도 많다) 때로는 그 거침을 지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용기를 주곤 했다. 언제 떠나도 그 걷는 길 속에서 배우는 게 너무 많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늘 삼만보를 걸은 나는 늘 고질병처럼 도지는 새끼발가락의 물집이 숙소에 도달하기 전 터진 상태였다. 게스트 하우스의 체크인 시간은 이상하게도 늘 다섯 시. 네시에 모든 올레길이 끝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근처 카페에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던, 그야말로 꽉 차고 알찬 하루. 아, 여행지에 와서도 왜 쉬지를 못하나 나 자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시에 필사모임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 나는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지, 나 퇴사했지. 그리고 나는 지금 바로 이곳, 제주도에 있다. 방음이 안되어 바깥의 이야기 소리조차 커다랗게 들리는 좁은 방안 침대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생각했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얻을까. 예민쟁이라 호텔방에서 조차 잠을 설치는, 장기투숙은 불가능한 체질의 나는 앞으로의 오 박 육일의 게스트 하우스 일정이 조금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다시 한번 더
용기.
**애플 워치 걸음 수: 30.487보
**18,19코스 중 반드시 들려야 할 곳:
1. 사라봉~애기업은 돌~잃어버린 마을곤을동 산책길
:바다를 끼고 보이는 산책길이 절경이다. 외진 입구에 쫄지 말 것. 막상 올라가면 정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마을 주민 할아버지들의 패이보릿 산책코스임을 느낄 것이다. 정자 건너편에서 보이는 한라산의 정기를 느껴보자! (근데 날파리도 많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안가를 끌어안은 애기업은 돌의 길은 최고의 등산코스. 비만 안 온다면 반드시 들리자.
2. 서우봉
일몰 명소라고 하던데 정작 홀로 여행을 떠났던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있지는 못했다. 올라가는 길이 살짝 경사지지만 충분히 보상될 만큼 바다의 풍경이 아름답다. 올라가는데 힘들다고 땅만 보지 말고 반드시 한 번은 뒤를 돌아볼 것. 선물 같은 풍경은 늘 우리에 뒤에 있다.
**맛있었던 음식점 및 카페
1. 옥란면옥
이렇게 탈수증이 와 실려가겠구나 싶을 때쯤 발견한 냉면 전문점. 나는 구수한 옛 노포를 상상하며 다가갔는데 웬걸 감성카페 못지않은 인테리어였다. 독특한 듯 익숙한 맛도 이 집의 매력 포인트. 더운 날 가면 좋을 곳이다.
2. 오드랑베이커리
내가 먹은 것은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 마늘 바게트. 빠삭한 바게트보다는 눅눅하고 촉촉한 바게트가 더 취향이라면 추천하는 곳이다. 와 그냥 너무 맛있는 집이다. 그리고 참고로 너무 크다. 나는 간식, 저녁 두 끼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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