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여행 2일차의 기록, 구좌읍 당근밭에서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제주 물가가 너무 비싸서 조식을 먹고 나가는 길이었다. 조식은 숭늉과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옛날 소시지 계란부침 세 개. 여주인분이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동안 나는 나에게 질문이 돌아올까 봐 접시에 코를 박고 숭늉을 들이켰다. 어디 가서 외향형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외향이라고 외치고 다니기에는 나는 너무 수줍음이 많다.
싹싹 비운 그릇의 설거지를 끝내고 짐 옮기미 서비스에 맡길 작은 캐리어를 밖으로 빼놓았다. 쓱 둘러보니 게스트 하우스의 사람들 중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사장님께 어색한 배웅을 받으며 나온 나는 몇 걸음 더 도로로 나가서야 꽃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을 목에 둘러매고 어제 마을 마트에서 산 중국산 등산 모자의 끈을 졸라맸다. 당당하게 안에서 쓰고 싶었는데 괜스레 머쓱하여 쓰지 못했다. 내 나이 방년 (아직) 이십 대. 젊은 나이에 올레길은 좀 흔치 않아 보였다. 이것은 합리적 결론이었다. 어제부터 내내, 올레길에서 내 나이 또래는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까.
오늘 갈 올레길 20코스는 큰 오른 없이 바닷길과 농길, 마을길로만 이뤄진 코스이다. 그래서 그런지 특별하다거나 새로운 느낌은 받지 못했었지만 늘 그렇듯이 시골길과 함께하는 여행은 소소한 즐거움과 놀람을 선사했다. 특히 비가 오고 있는 올레길은 말이다.
올레길이 으레 그러하듯 작은 시골길을 걷게 되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말님이 당근을 드시고 있을 때도 있고(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노여워하실까 봐 찍지 못했다), 구좌읍 유월에 당근밭은 왠지 몽땅 마늘밭(처럼 보이는 파밭)이 이었으며, 사람 하나 없는 농공단지에 우산을 쓰며 지나가다 지레 놀란 꿩 때문에 내가 두 배는 더 놀란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아니 또 야생 셀러리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고수보다 셀러리가 더 싫은 나로서는 바닷바람의 짠내를 타고 흘러오는 셀러리 냄새에 미간을 여러 번 찌푸리기도 하였다. (그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진짜 셀러리 너무 많다)
암튼,
이렇듯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삶이 이렇게나 버라이어티 하고 자연친화적이게 된다. 어제는 사실 내 나름의 낯가림으로 아직 제주도가 머쓱했고, 오늘은 좀 익숙해지나 했더니만 안심하기에는 날씨가 영 심상치 않다. 비가 오는 제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외진 숲길을 걷는 올레길을 혼자 걷는 나에게는 아주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아이고, 부모님한테 절대로 이번에는 위험한 길은 안 가겠다고 약속하고 왔는데. 구좌읍에 특산물은 당근이니까 당연히 당근밭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마늘밭(아니 파 밭)뿐이었던 농공단지를 지나가면서 생각했다. 비가 와서 땅은 질척 질척, 운동화는 진흙이 가득 묻어있었다. 이건 닦아서 될 게 아니다. 하루에 이만 보 이상 걷고 있는데 버티고 있는 것이 용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반드시 버리리라 으쓱한 당근밭, 아니 파 밭을 지나면서 다짐했다.
제주의 길은 잘 닦여있는 길들을 제외하면 울퉁불퉁한 현무함이 소담스러운 풀 들과 함께 고개를 든다. 올레길에 다녀왔으면서도 갈 때마다 까먹고는 하는데, 사실 오래 걷기에는 기본 운동화는 맞지 않다. 한 코스가 아니라 여러 코스를 다녀올 예정이라면 운동화보다는 꼭 등산화를 신는 게 좋다. 왜냐면 이렇게 질척 질척한 길들을 꼭 만나게 되니까.
“으앗!”
농공단지의 길은 양심도 없게 횡으로 끝까지 물에 잠긴 길을 자주 만나고는 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냐. 나름의 요령으로 길의 가장자리를 살금살금 디디며 건넜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발을 흙탕물에 담그지 않고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길들이 많았다.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어찌할 도리없이 웅덩이에 발이 잠기고는 했는데 이 낡은 운동화에게도 아직 저력이 남아있는지 오히려 큰 웅덩이는 도무지 양말까지 젖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도 잘 샀다고 생각할 무렵 숲길을 헤집으며 가게 되었고, 우습게도 풀에 맺힌 이슬에 양말이 폭 다 젖고 말았다.
왜 이럴 때 여러 가지 속담이 떠오르나 모르겠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고 따뜻한 태양이었고, 작은 고추는 매우며,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말은, 아주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물웅덩이가 아니라 풀에 맺힌 이슬이 양말을 젖게 하듯이. 어쩌면 인생을 바꾸는 건 커다란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시도들이 아닐까.
혼자 다니니까 별게 다 생각이 난다. 어떠한 것을 보든지 나에게 질문하고 나 스스로 답을 하게 된 까닭이다. 생각이 많은 나는 하루종일 걷고 하루 종일 생각한다. 물론 하루에 삼만 보 가까이는 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드디어 양발 새끼발가락 물집이 모두 터졌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오늘의 숙소는 내 인생 최고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소박한 절간 같은 느낌의 아늑한 공간은 여자 주인분의 세심한 케어 안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깨끗하고 포근했다. 예민쟁이인 나도 숙면을 취할 수 있었을 만큼. 왜 이렇게 남은 삼일이 아득한지 모르겠다. 할 게 없다고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낯설다. 다행히 올레길이 있어 일정들을 채워 놓고 있지만, 나에게 빈 시간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언제부터 내게 불안감이 되었을까.
**애플 워치 걸음 수: 25,973보 (18.14km)
**20코스 중 반드시 들려야 할 곳
1. 김녕해수욕장
: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옥빛의 바다가 펼쳐지는 곳. 해수욕장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바다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그 옆 해안길을 산책하면 김녕의 바다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2. 제주풀무질 (서점)
: 세화고등학교 근처의 작은 서점. 서울 한 대학교 근처에서 오랫동안 책방을 하신 사장님이 정겹게 맞아주시는 곳이다. 세상의 공존을 위한 책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정상 맘에 드는 책만 사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서점 옆 풀무질 카페에서 책 한 권과 함께 당근케이크를 먹으면 최고의 오후가 아닐까 싶다.
3. 어떤날게스트하우스 (제주 동쪽)
:제주 여행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게스트 하우스. 깔끔하고 차분하신 사장님의 섬세한 손길로 곧곧이 관리되는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이다. 아주아주 깨끗한 방안은 개인용 화장실이 달려있어서 무척이나 편리하고, 공용공간에서는 책도 볼 수 있고 음식도 만들어 주신다. 조식은 무료로 제공되나 석식은 카페처럼 운영되니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하고 방문했을 경우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직접 만들어주시는 채식 위주의 조식으로 든든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곳. 개인적으로 다음에 제주여행을 하면 또 들리고 싶은 곳이다. 이용하는 내내 지인의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