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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마 Jun 27. 2023

인생은 새옹지마

퇴사여행 3일차의 기록, 성산읍의 파리 네 마리, 아니 세 마리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내 인생 최고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났는데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게스트 하우스를 만난 것이다.


“… … 어쩌냐. “


 나는 웽웽 거리며 탁탁 창문에 부딪히는 네 마리, 아니 세 마리에 파리를 보며 작게 읊조렸다. 한 마리의 파리는 이미 명을 다해 침대 위에 있었기에 엄밀하게는 총 세 마리였다. 이럴 수가, 나보다 먼저 들어온 손님이 있다니.


 그렇다, 나는 지금 이십일코스를 끝내고 성산일출봉 근처 숙소에 와 있었다. 사실 저녁 식사로 ‘단백’이라는 일인용 화로 숙성 고기 집을 가기 위해 이쪽으로 숙소를 잡았던 것인데 성산읍 근처에는 괜찮은 숙소가 많지 않아 그래도 나름 엄선한 곳이었다. 아뿔싸 사진에 속은 것이다. 이렇게나 사회가 흉흉하다니. 잘 꾸며진 사진과 완벽한 리뷰에 속아 버렸다. 예약하기 전에 사진을 한번 더 확인해 볼 걸, 이런 된장.


 나는 잠시 한숨을 푹 내 쉰 뒤 무거운 캐리어를 방 한편 구석에 주차했다. 이 와중에도 술을 안 먹어서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한 식당에서 고기를 먹다가 자연스레 술이 생각났었는데 왠지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유혹을 꾹 참고 돌아온 길이었다. 자, 나는 맨 정신이라는 건 좋은 소식인데 이제 저 친구들은 어떻게 처리한담.


 "아이고 되다."


 침대 위에 풀썩 앉으니 먼지가 폴폴 날리는 착각이 들었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들을 게스트하우스 직원분의 도움으로 모두 물리치고 나서 비로소 앉은 참이다. 방금 전 나와 그분은 마치 브레스를 뿜는 용 앞에서 선 부들거리는 신입 전사 같았다. 대신 우리의 장비는 (좀 낡았지만) 다이아몬드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문명의 이기, 전기 파리채가 있었으니까! 엄청난 밸런스 붕괴로 파리님들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고 나는 다시 한번 꼼꼼히 침대 위를 살피다 이내 체념하고 이불을 덮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더는 살필 기력이 없었다. 월요일, 화요일, 지금 수요일까지 - 십팔, 십구, 이십, 이십일 코스를 완주한 셈이다. 애플워치의 활동앱의 동그라미가 하염없이 돌아간다.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여행인가 하는 의구심이 내심 든다.


 조금 더러운 듯한 흰색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방을 바꿔야 하나,라는 합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나는 사실 이 커다란 더블 침대의 아주 끝, 가장자리에 살며시 누워있는 상태였다. 내가 이 방에서 잠을 푹 잘 잘 수 있을까. 나는 쉬러 온 건데. 내 곁에 다른 벌레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솜털이 쭈뼛쭈뼛 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작은 탁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꺼내어 어제 갔던 숙소의 남은 자리를 확인했다.


[예약 가능 방, 없음]


 여기가 어디더라, 성산읍. 나는 내일 코스가 어떻게 되더라. 이것저것 일정들을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 이내 핸드폰을 덮었다. 방 값 오만 원을 또 지불하기에는 이제 막 학생 신분으로 넘어온 나에게는 제법 타격이 크게 느껴졌다. 이틀 치의 방값을 날리다니, 그게 얼마야. 그러면서 다시 침대 속에 구겨질까 하다가 마음이 너무 찝찝하여 침대에서 내려와 차가운 바닥 위에 앉는데 내심 씁쓸해졌다. 고정수입이 없다는 건 조금 슬프구나, 새삼 깨달았다.


 스무 살의 나였다면 이 방을 만족했을까. 분명 몇 년 전에는 어떤 게스트하우스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라는 걸 나는 이 세 번째 숙소에서 깨달았다. 결핍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도. 사회의 통념 적으로던 개인의 취향으로 던, 나는 좋지 못한 것과 좋은 것을 은연중에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적 풍요에 중요성을 알고, 또 그 마음들을 소중히 여기고자 노력하지만 가끔은 돈 말고, 좋아 보이는 거 말고, 있어 보이는 거 말고 내가 무엇을 진짜 좋아했는지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다 하루종일 걸어 땀에 폭싹 젖은 옷은 더는 입을 수 없어 씻기 위해 서둘러 일어났다. 이제 보니 캐리어의 담긴 오 박 육일 치의 짐이 어느덧 반은 줄어있었다. 칫솔과 세안도구들을 세면대에 놓고, 내일 입을 옷들을 방 한편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새로운 숙소를 들어갈 때마다 느낀 것은 인간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체취를 방안에 남긴다는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 낯선 곳을 채워 넣으면서 이 새로운 환경을 내 공간을 만들어 버리는 것은 마치 의식처럼 행해지곤 했다. 낯선 장소에서 살아나가게 하는 힘은 '정이 가는 구석'이라는 용기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난생 처음 홀몸으로 떨어졌던 영국에서 느낀 감상이기도 하였다.


 하루 종일 뭍은 온몸의 먼지들을 시원하게 물로 흘려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이 작은 방에도 에어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찝찝하고 조금은 눅눅한 제주도의 날씨. 나는 에어컨의 약간의 냉방 기능과 제습기능을 틀었다. 쾌쾌한 먼지가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송보송한 공기가 그리워 전원을 눌렀다. 그리고 이내 이 벌레가 나오던 작은 방은 제법 살만한 곳이 되었다.


점점 시원해지는 공기를 느끼며 인생은 참 묘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전만에도 이 방에 하룻밤도 못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이렇게나 적응력이 빠르다. 에어컨과 샤워만으로 이방은 순식간에 아늑한 공간으로 변했다.


 하루를 조금 정리하고, 방을 정리하고,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우니 어느덧 잘 시간에 가까워졌다. 오래 걸어서 좋은 점은 잠을 푹 못 자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길게만 느껴졌던 여행이 어느덧 반을 지나고 있었다. 내일의 나는 또 무슨 생각을 얻고, 또 어떤 마음들을 버리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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