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여행 4일차의 기록, 우연히 도착한 낯선 섬에서
'인생은 늘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이끌고, 내가 낙담하는 사이 나를 놀라게 할 때를 기다린다.'
나는 지금 세화에 작은 카페에 앉아 있다.
내가 여기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지극히 위의 문장과 같았다. 요가를 좋아하는(듯 보이는) 사장님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구좌읍 대표 생산물인 당근케이크가 맛있는 이곳. 잔잔하고 서정적인 플레이스트가 빗소리와 섞여 카페를 가득 채운다. 아, 나 진짜 휴가 왔구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여행은 핸드폰 별표 안에는 없다.
사실 오늘은 올레길 2코스를 걷고자 계획했던 날이다. 빗줄기가 무척이나 굵었지만 우비를 입고 걷겠노라 굳건한 마음으로 바닷가 앞까지 갔다 온 길이었다. 막상 해변가에 도착하니 비바람과 파도가 예사롭지 않았고, 그야말로 '집채만 한' 파도는 인생에서 처음 본 크기였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포기한 채 지도앱을 켰다. 어디를 가기로 했더라. 며칠 전에 산 만 원짜리 산악모자가 바람에 위태롭게 달랑거렸다. 바닷물이 안개처럼 퍼져 얼굴 위에 가득히 내린다. 나는 빗물이 묻은 손으로 한참을 지도앱을 뒤졌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무작정 버스에 타버렸다. 비는 오고, 춥고. 버스창을 쓸어내리는 빗물들을 바라보며 한 시간 남짓 동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 다행히 지인이 추천해 준 책방이 생각났다. 그리고 무작정 이곳, 세화에 내리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는 뭐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과 연속.
비 오는 와중에 재빨리 지도앱에서 찾았던, 평점이 좋고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집이 연속 2타로 문을 닫고 (한분은 휴무날, 한분은 급성 염좌였다)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길바닥에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낡지만 이 정감이 가는 핸드폰은 여행 상황에서는 늘 애물단지가 되곤 했는데 그날도 여김 없이 너무 빨리 달은 핸드폰 배터리가 곧 사망을 알리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남은 생을 불태워 15분을 걸어갔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만난 소품샵에서 여행선물로 거금도 쓰고 나왔다) 아니 웬걸, 아무런 고지도 없이 또 휴무날이었다. 안돼, 더는 이제 걸을 힘도 없는데…. 그렇게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쯤 보였던 것은, 커다란 카페에 가려 있는지도 이제 막 알게 된 바로 그 옆가게. 아뿔싸 옆가게도 카페였던 것이다!
빗소리가 카페 안을 가득히 채웠다. 좌식 책상에 앉아 있다 자세를 고치고는 숨을 깊게 들이켜고 내쉰 참이다. 좋구나. 이곳은 왠지 모르게 요가원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감고 있다 여태까지는 배경 음악이었던 가수의 목소리가 비로소 가사로 와닿았다. 사실 이 곡의 제목은 나중에 찾아봐서 알게 되었는데 이름도 뜻도 제대로 모른 채 나는 곡을 듣자마자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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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내일 같은 곳에서
당신은 늘 나를 기다리며
내 방이 나의 온기를 잃을 때
날 겨울처럼 어루만지네
나을 수 없는 마음을 붙잡고
부서지는 머리칼을 만지며
들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다
까무룩 네 품에서 잠들까
[다린 - 새벽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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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몇 해 전 그림 모임 작업실에서 Y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노래로 장면과 인생의 어느 순간을 기억하고는 한다고. (Y는 기억할까) 야속할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운 날이면 계속해서 같은 음악을 듣곤 한다고. 나는 그 말의 뜻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게 지금 같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제주도에 갔을 때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틀어주신 ‘백야’라는 노래가 주제곡이 되어 이 노래만 들으면 제주도가 떠오르고는 했었는데.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는 이 노래가 그중 하나가 되겠구나.
여기를 가려다가 못 가고, 저기를 가려다가 못하고. 우연히 들린 소품샵에서 거금을 쓰고 나오는 길목에서 나는 또 길을 잃었다가 드디어 이곳을 만난 하루였다. 예상치 못하게 도착한 이 섬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냥 스쳐 갈 뿐인, 오늘 하루뿐인 사치 라고 해도.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겨 놓고는 또 그리울 때쯤 슬그머니 꺼내 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