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계절을 건너는 사람

감정과 기술 사이의 성장

by jayjay

카페와의 이별은 전혀 다른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플라워샵. 그 이름만으로도 생경하고 낯설었던 세계. 8년 동안 커피 내리는 손길에 익숙했던 나의 하루는 이제 꽃줄기를 자르고, 리본을 매고, 향기를 다루는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무릎은 여전히 삐걱거렸고, 걷는 걸음은 완벽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마음만은 가벼워졌고 뜨거워졌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사실.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하루하루 숨이 벅차오를 만큼 설렜다. 플라워샵이란 단어가 처음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색감에 기민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매장을 운영하며 선물 받은 꽃으로 화병에 한 송이 꽃을 꽂을 때마다 공간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꽃 한 송이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그 울림. 바로 그 감정이 나를 이끌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설렘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워야만 했다. 꽃의 이름도, 계절도, 포장 방식도. 누군가의 중요한 날을 위해 꽃다발을 만드는 일.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기록했다. 줄기 사선 절단, 물갈이 주기, 햇볕 피하는 법, 보관 온도. 기록은 나의 언어였고, 그렇게 꽃이라는 낯선 존재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플라워 어레인지먼트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 내 안의 또 다른 감각이 열리는 걸 느꼈다. 손이 따라주지 않아 당황하던 순간도 있었고, 꽃잎 하나 찢어졌다고 괜히 마음이 아려오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 손끝은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눈은 색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꽃은, 단지 예쁘게 묶어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꽃은 감정 그 자체였다. 생일, 기념일, 입학, 결혼, 장례. 꽃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이는 시점이었다. 나는 고객의 말투, 눈빛, 망설임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어야 했고 그 안에 담긴 말을 꽃으로 번역해내야만 했다. “제 딸이 스무 살이 됐어요. 부드럽고 기분 좋은 색으로 부탁드릴게요.” “어머니가 입원하셨어요. 너무 화려하진 않게, 하지만 따뜻하게요.” 개개인의 다양한 요청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을 고르고, 꽃의 질감을 맞추고, 리본 하나 묶는 방향까지 의미를 담으려 애썼다. 그것은 카페와는 전혀 다른 깊이의 감정노동이었고, 그만큼 보람도 깊었다. 인수시기는 극성수기인 5월! 어버이날, 스승의 날. 꽃집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새벽 다섯 시 꽃시장에서 시작된 하루는 밤까지 이어졌다. 손가락은 핸드타이드를 위한 굳은살이, 몰려오는 다리와 허리의 통증은 직접 선택한 길이라 조금도 불평할 수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이라도 매일 성장하는 스스로에 놀라웠고, 몸보다 마음이 훨씬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매장 정리, 포장 자재 정비, 새로운 제품 구성. 하나둘 손을 대다 보니 가게는 더디지만 나의 색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드라이플라워와 함께 구성한 선물 패키지. 카페 운영 경험이 자연스레 녹아들었고, 고객들은 작은 변화에도 반응해 주었다. 물론 실수도 있었다. 꽃 이름을 혼동해 잘못 입고하거나, 예약 날짜를 혼동해 고객을 기다리게 한 적, 배송 사고등으로 심장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날이면 자책과 불안으로 며칠 밤을 설쳤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조차 성장하는 재료라는 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꽃과 함께 계절은 흘렀고, 계절을 건너는 사이, 함께 변해갔다. 봄에는 프리지어와 작약, 여름에는 해바라기와 리시안셔스, 가을에는 국화와 달리아, 겨울에는 포인세티아와 동백. 꽃은 계절의 언어였고, 그 언어를 배우는 사람으로 그리고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카페에서 플라워샵으로. 그 변화는 단순한 업종의 전환만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의 방식이 달라진 것이었다. 더 부드러워졌고, 더 섬세해졌으며, 사람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 속에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누군가의 인생 한 장면을 꾸며주고, 그 장면은 다시 내 삶에 따뜻한 흔적으로 남는 것 같다. 꽃을 다루는 일은, 결국 사람을 대하는 일이었다. 그 섬세한 감정을 건네고 받으며, 살아 있는 존재로 이 계절을 지나 또 다른 계절로 향할 것이다. 꽃처럼, 피어나고 지고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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