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삼각지대

첫사랑과 도구와 어린 열정

by 굴히

어깨에 툭 걸쳐 맨 가방을 열면 가죽 장정 노트와 뭉툭한 연필, 카메라 필름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가을. 추에카(Chueca—노천 카페와 부티크 상점이 즐비한 마드리드 중심지의 활기찬 동네)의 골목을 충동적으로 휙휙 꺾어가며 걷던 중, 함께 교환 학기를 보내던 친구가 "스페인에 오면 가만히 있어도 스페인어가 늘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라는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게 아닌가. 미국에서 지낼 때에는 숨 쉬는 공기에 영어가 섞여 들어오기라도 하는 듯,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히 영어가 입과 귀로 스미는 게 느껴졌다. 욕조에 물 받듯, 열어둔 창문을 넘어 바깥 냄새가 실내로 섞여 들어오듯 조금 조금.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매일 나를 노려보는 어학 학습 어플의 협박성 알림에 못 이기는 척 10분이라도 공부하고, 한 단어라도 더 외우고, 한 마디라도 더 들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무 발전도 없었다.



추레리아(churreria, 추로스 가게)에 가면 어차피 '초콜라떼 꼰 추로스(chocolate con churros, 핫 초콜릿과 추로스)'를 주문할 테지만 괜히 메뉴판을 읽는 척하며 혼자 몰래 'doble erre(rr)' 발음 연습을 한다. "추rr로스와 뽀rr라스 주세요." '아르르르' 하는 발음의 진동이 구강을 채우고, 이 주문을 실수 없는 스페인어로 마치겠다는 비장함만은 무대에 서기 전 목과 얼굴 근육을 푸는 가수와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안간힘을 써야만 한 문장을 발화할 수 있는 게 스페인어다. 그럼에도 강렬한 색채의 스페인어는 내게 늘 어린 열정과도 같은 언어다.


스페인어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초급 스페인어의 범위에서는 그렇다. 음식점에서 주문을 할 때에도 "Me pones (You put me)", "Dame (Give me)" 하고 말하는 직설적인 말 문화는 이베리아의 맹렬한 태양을 닮았다. 굴리는 발음은 빠른 유속의 강 같고 흘리는 억양은 나른한 한낮의 시에스타 같다. 라틴어를 품에 안고 질주하는 투우 경기의 소, 혹은 사어(死語)를 끌어안고 추는 플라멩코.



보도 타일을 녹여 버릴 듯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부터 넉 달을 온통 스페인어에 둘러싸인 채 보내다 잠시 런던 여행을 다녀왔다. 빨간 전화 부스를 몇 개 지나는 동안 눈에 보이는 활자, 귀에 걸리는 중얼거림이 모두 영어로 된 나라에 다시 도착했다.


태생부터 내게 심어졌고 나와 함께 자라온 한국어 어휘, 어법, 표현의 풍성함을 각별하게 생각해왔다. 고등학교 외국어 시간에 처음 접한 스페인어 역시 배우기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인지 찬찬히 공을 들여 공부하고 있었고, 뿌리를 같이하는 다른 언어와 연결되는 가교로서도 반가운 말이다. 불어나 독어 등, 이외의 언어도 가끔 몇 단어, 몇 문장 주워 얻기를 무척 기꺼워했다.


그런데 영어는? 표준 교육과정을 밟는 중에는 달리 어떤 의미가 될 수 없었던 수단으로서의 영어. 언어 뭉치를 씹어 시험지를 뱉어내는 지난한 날들에 진력이 나 영어가 성적을 위한 필요 이상의 뜻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나라로 학습의 터를 옮기기까지 했었다. 미국, 그중에서도 한국인 한 명 없는 작은 마을에서 새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곳에서도 그토록 제대로 공부하기를 원했던 영어를 충분한 시간을 소요하며 뿌리부터 알아가지 못했다. 당장 매초 쏟아지는 영어의 폭포에서 건질 수 있는 어휘와 문장을 모두 재빠르게 건져 삼켜내는 생존이 더 급했으니까.


영어로 꿈을 꾸고, 한국어보다 영어로 먼저 떠오르는 개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이후로는 싫은 생각을 영어의 몫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영어 모드'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느껴지는 만큼, 꼭 그만큼 삐쭉빼쭉 비뚤어진 말도 쉬웠다. 모난 말을 내 입에 머금어 물어도 한국어 환경에서만큼 스스로에게 실망하지는 않아도 되어서. 한국어의 섬세함이 나를 관통해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다면, 영어는 훨씬 뭉툭한 충격이라서. 한국어로 처리하는 부정과 회환은 내 정신을 너무 크게 갉아먹는다는 이유로 날이 무딘 영어에게 그 짐을 몽땅 지워왔다.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모든 상황에서 내 불편을 타개할 도구로만 취급한 것도 모자라서.


영어의 한복판에 다시 놓이고서야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애틋한 모국어라는 사실을 오래 잊고 지냈음을 깨닫는다. 모든 언어에게 가졌던 순수한 존중의 영역에서 오직 영어만 배제하고 있었음도. 영어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할 때의 울림과 한국어 발화에서보다 훨씬 커지는 얼굴 근육의 쓰임에서 다시 특별함을 느끼게 된 것만으로도 런던 여행은 성공이라 할 만하다.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 만나는 낯선 사람과의 교류에 있는데, 런던에서는 그 기쁨에 온전히 내던져질 수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 방문에 앞서 트라팔가 광장을 둘러보던 중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들의 과제를 도와준 일이 있었고, 갤러리에 들어서며 소지품 검사를 하던 경비원 선생님께서 내 가방에 달아 둔 토끼 키링을 가볍게 눌러 보시며 "여기 안에도 뭐가 든 건 아니겠죠?" 하고 농담을 하신 일도 있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몇 마디 대화가 퍽 귀여워 자꾸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스페인어가 서툰 탓에 마드리드에서는 낯선 사람이 걸어오는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덜컥 긴장부터 해야 했고, 먼저 말을 걺에 있어서도 늘 큰마음 먹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반면 여기 런던에서는 방금 내가 고른 단어가 어색했을 것이고, 그 음절을 잘못 발음하였다거나 동문서답을 했다거나 문법에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 없이 발화할 수 있다니.


바로 그 이유로 나는 당시 두 계절째 머물고 있었던 마드리드에서보다, 난생처음 밟아 본 런던 땅에서 조금 더 편안함을 느끼는 때도 있었다. 그 긴장 없음이 머쓱하고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서도.


근데, 모든 관광객이 내 나라 말을 하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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