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끌어안는 팔
2024년 12월 31일
Bellevue Straße, 베를린
베를린 필하모닉의 제야 음악회를 앞두고.
칼바람이 발음과 표정을 만드는 근육을 죄 얼린다. 도망치듯 카페로 들어간다. 머리가 띵하게 울린다. 겨울 깊은 연말의 골짜기에, 금사 같은 에스파냐의 햇볕을 마다하고 기어이 베를린에 있도록 일정을 짜 맞춘 건 순전히 오늘 저녁 베를린 필의 제야 음악회 때문이었다.
예매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 음악회를 얼마나 기대했고, 머릿속으로 먼저 살아 보기를 몇 차례 거듭했는지. 언제나 연말이 가쁘게 쫓아오는 것이 두려웠고, 한 해의 끝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었는데, 2024년에는 이 제야 음악회 덕에 말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티켓에서 티켓으로 넘어오는 길이 무척 길었다. 아직도 음악회 시작까지는 시간이 길게 남았고 지금 앉은 카페에서 공연장까지는 도보 7분 거리. 얼른 왕관과 오각형 모양의 금빛 콘서트홀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로비의 들뜬 북적임 속에 서 있는다. 인파가 몰리는 곳을 피하려는 편이지만, 그날만큼은 심포니홀의 와인잔 부딪는 소리와 구두굽 소리, 함께 울리는 대화가 기꺼웠다.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을 장식하듯, 모두가 무언가 특별한 일로 채우려 벼르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인생에 몇 번이나 가질 수 있을지 모를 그 귀한 시간의 자리를 음악에 기쁘게 내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여기 운집해 있다.
음악에는 물리적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청중을 현실로부터 유리하는 감각의 돔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객석이 중심부의 무대를 둘러싸도록 설계된 최초의 빈야드(vineyard, 포도밭) 스타일 콘서트홀로, 이 비물질적인 돔을 건축물로 구현한 공연장이다.
이천 명 넘는 청중이 무대를 에워싸 끌어안는다. 음악은 애정의 중심에 자리한다. 무대를 객석 전면에 배치하는 슈박스(shoebox)나 부채꼴 스타일의 공연장에서는 시야에 연주자만 존재하는 반면, 여기 둥근 객석에서 청중은 필연적으로 건너편에 앉은 타인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이 모든 사람들과 절대 반복될 수도 복제될 수도 없는 한 시절의 음악을 나눌 헐거운 공동체가 되었음을 안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이 마지막 연주회를 연다.
협주(協奏)는 ‘화합하다’, ‘돕다', ‘협조하다’의 의미를 갖는 ‘화합할 협’ 자를 쓴다. 그 글자는 다시 세 개의 ‘힘 력(力)’과 ‘열 십(十)’ 하나가 결합한 형태로, 여럿이 힘을 합한다는 뜻이 된다. 악기는 각자 다른 성부를 연주하고, 현을 긋거나 폐를 부풀려 숨을 불어넣거나 페달을 밟고 건반을 쥐는 동작 중 머릿속의 말들은 전부 다를 테다. 그럼에도 분리될 수 없는 선명한 공명으로 합일하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화합이다. 나의 몫을 알아 내 소리를 명확히 내면서도 동시에 다른 성부에 귀를 열어두는 것. 타인의 소리를 듣되 지켜야 할 심지를 지키는 그 단단한 기술이 협주에 있다.
오늘 내어놓을 음악의 기쁨으로, 음악에 대한 헌신으로. 합일하는 다름이라는 점에서 함께하는 음악이 너무도 아름답다.
연주가 지속되는 동안 검고 굳건하게 빛나는 피아노를 응시하며 아득해진다. 무대를 비추는 훤한 조명은 수술실 전등처럼, 콘서트홀은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쇼'였던 19세기의 공개 외과 수술 현장처럼 보인다. 비밀을 허용치 않는 조명 아래, 수술대 앞으로 전진하는 연주자의 걸음. 수천의 이목 앞에 스스로 개복하여 활동하는 내면과 손가락을 춤추게 하는 내러티브를 시시각각 낱낱이 내보인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담력을, 그를 넘어서는 사랑을 요하는 일인가.
지휘봉이 비상하는 순간, 뒤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매 순간 가능한 최선의 해석을 내놓으며 쏟아지는 매 기호를 받아내야 한다. 힘에 부쳐도 쉼표 하나 숨표 하나 없는 구간이 있고, 아쉬워도 뒤돌아보게 해 줄 도돌이표 하나 없는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연주를 계속해야만 하는 것. 순간의 선택과 한 음의 해석이 한 마디를 쌓고 세계를 담은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는 믿음 하나로. 음악과 생(生)은 이토록 닮아 있다.
청각의 장막 뒤로 어떤 세계가 펼쳐진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다. 그걸 심상이라고 부른다. 다른 어떤 날 아닌 바로 오늘, 이 객석을 택한 타인과 내밀한 장면을 함께 목도하였으므로 비밀스러운 결사가 이루어진다.
한 목요일 저녁에는 목격을 넘어 숨을 함께하는 객석 공동체를 만났다. 작은 피아노 독주회였다. 공연장의 정중앙쯤 되는 자리에 앉았다. 연주자가 직접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갔다 다시 등장하기까지 짧은 텀에, 앉은 모든 고개가 그 문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검고 둥근 실루엣이 둥둥 뜬 채 같은 방향을 향하는, 기대를 공유하는 객석 공동체. 두 번째 앙코르로 선물 받은 트로이메라이의 첫 두 음이 울리는 순간 앞뒤 양옆에 앉은 분들과 함께 작게 탄식했다. 아, 이 숨의 얕은 결속으로 우리는 존재하는구나.
음악의 자리에서 우리는 눈과 호흡을 나눠 갖는다.
좋은 작품을 만나고 온 날에는 연유 모를 책임감을 느낀다. 아름다움을 향유할 특권을 얻었으니 예술의 덕에 맞는 삶을 꾸려 나가고 싶고, 그렇게 함이 합당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위대한 거장들이 작품을 통해 외치는 것과 예술을 통해 경험하는 은총은 너무도 거대해 나는 평생 이 의미를 살아내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럴 때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초입에 선 듯한 아득함, 아(我)의 미련함에 대한 탄식과 동시에 생의 끝까지 탐닉하여도 고갈되지 않을 앎의 샘을 얻은 기쁨에 압도되곤 한다. 큰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의 감각과 비슷하다. ‘언제 이 많은 책을 다 읽지?’ 싶어 조바심이 나면서도 영원히, 영원히 더 깊숙이 빠져들고 싶은 또 다른 세계로의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