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을 요하지 않는 사랑
걷는 건 때로 어느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또는 걷기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음악을 듣고자 함이었다. 가을 산책에는 슈만, 브람스와 슈베르트. 겨울에는 슬라브의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스크랴빈스키, 혹은 시벨리우스. 봄여름에는 산뜻한 피아노 소품, 목관악기가 두드러지는 곡이 주로 곁을 지켜 주었다.
예민한 성정인 탓에 자주 긴장하며 산다. 별것 아닌 소리도 심장을 툭 떨어뜨리고 유독 날이 서는 날에는 피부도 없이 온 근육과 신경을 바깥으로 드러내놓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최소한의 보호막도 없이 꿈틀거리는 취약함을 외부 자극에 온통 내보이는 듯이.
그럴 때마다 음악으로 도망한다. 외부 세계의 소음이 내면의 소망과 합치하지 못할 때, 고집 센 자아의 시위가 너무나 크게 울려 내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헤드폰 속에서, 객석에 앉을 여건이 허락되는 날에는 무대 위에서 나보다 더 큰 공명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발견한다.
한창 중간고사가 이어지던 4월. 전공 시험과 사이 빈 18시간을 쪼개어 작은 규모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찾았다. 평소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 관람 전에는 충분히 잠도 자고 적당히 먹어 좋은 컨디션으로 집중할 수 있게 하려고 하는데, 그 주에는 일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 8분으로 측정되었으니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다른 전공 시험 두 과목을 쳐내며 교감신경이 과흥분된 상태에, 이동 시간에 쫓겨 저녁도 거른 채였다. 1부 연주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던 걸 그제야 느꼈다.
객기에 가까운 일정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객석에 앉아야 했던 것은 음악이 만들어 줄 성채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연주가,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사념이 끼어들 틈이 없으니 그 소리가 내게 가장 단단한 보호막이 되어주리라, 나를 둘러싸 끌어안고 있어 주리라 믿었기에. 오선 틈새에 몸을 숨기고 손과 숨이 직조하는 화성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으면 성벽 바깥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데요,
사랑에게로 도망해도 될까요?
그리 귀히 여기는 것을 도피처로 삼아도 되나요? 쫓기듯 달려 도망하다 사랑을 발견하고 그 속에 숨은 나는 엉망진창입니다. 내 질척이는 발자국이 그리 귀한 것을 밟도록 두어도 되냐는 말입니다.
음악은 흐르고 또 흐른다. 시대도 음악 안에서는 멈추지 않고, 국경도 악보 위의 세로줄 하나보다 힘세지 않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을 작곡가와 음악가들로부터 흘러온 가장 청순한 사랑이 오선지 위에 까만 열매로 맺혔다. 경계는 없고, 기호로 그린 사랑만 있을 뿐.
참으로 통역을 요하지 않는 것이 음악이다. 언어보다 깊은 속내를 길어 말도 몸도 없는 소리에 입혔으니 장벽을 무력화하고 듣는 이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통번역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손실을 넘는 순수성. 감히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감정을 표현하고 느끼는 데에 언어화된 설명을 요구하지 않으므로써 가장 정확한 의미 전달을 달성한다. 묵묵한 추상성은 채근하는 법이 없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위로다.
음악이 가진 이 기묘한 적확성은 역설적이게도 청자를 저마다의 고립된 사실로 안내한다. 음악이 품은 이미지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분량의 손상 없이 원형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외려 다양성으로 분화될 여지가 풍성하다. 가공과 가감이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각자의 내면에 정확히 명중하므로, 충돌 이후 발생하는 파문은 살아온 생의 굴곡만큼이나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전달 과정에서 깎여 나간 분량이 없으니 속에서 다시 피어날 가능성도 무한해진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단방향으로 흐르는 건반의 눈물과 사방으로 뻗는 비정형의 심상 사이에 부유하며 같은 이름표를 단 정서가 결코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해석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어떤 명칭을 주어 부르고 있어도 청자가 저마다 느끼는 감정의 층위와 깊이는 하늘과 땅 차이. 음악은 잠수부의 납덩이같다. 음악에 편승하면 온실 같은 생에서 감히 가닿을 수 없었던 감정의 저변 근처를 쓸어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만날 때마다 내가 감각하는 세상이 얼마나 얕고 좁은가를 통감한다. 더 민감하지 못해 놓치는 것이 몇이나 될까. 얕은 잠에서 깬 어떤 밤중에는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줄기에 보는 눈, 듣는 귀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무얼 보고 듣게 될지도 모르면서 감당 못할 것을 바란 건 아닌지.
아름다운 것들 더 가깝게 끌어안고 싶어서, 통제할 수 없는 바깥의 그 무언가가 예민함을 찔러오는 것쯤이야 기꺼이 견디겠다고 하고 싶어진다. 편두통을 견디면서도 아름다운 것들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다면 이쯤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척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피부도 없이 걸으면서 차마 겉옷을 입겠다고는 하지 못하는 것. 일종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