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부터의 타락
태초에 Spirit이 있었다
어떤 집단이든, (긍정적인) 목표와 이상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물건을 팔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 갈등을 조정하고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있는 재판소,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 등. 집단에 있는 모두가 같은 Spirit과 열정을 공유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시금 명시지 와 암묵지의 구분을 쓴다면, Spirit이라는 암묵지가 서로 공유되는 "공동화"의 과정이라 하겠다.
보편화를 위한 법칙
작은 집단은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커지기 마련이고, 구성원 수가 많아지면 모두가 같은 Spirit을 공유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작동은 계속해야 하겠기에 원조 Spirit을 아는 사람들은 최대한 이를 잘 표현하는 규칙을 만들기 마련이다 (암묵지 -> 명시지라는 표출화 작업을 거쳤다). 기업에는 KPI가, 재판소에는 헌법이, 교회에는 교리가 생겼다. 이제 원래 Spirit을 모르는 사람들도 명시화된 규칙 (Field Manual)을 알면 이 집단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AM으로의 타락
암묵지는 명시지를 다 담을 수 있어도 명시지는 암묵지를 다 담지 못하므로 아무리 자세히 쓴 법칙이라 하더라도 원 Spirit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또한 집단이 넓어지면서 각 영역에 적합한 다양한 규칙이 필요해지는데 유연하지 못한 보편법칙은 이를 다 따라잡지 못하므로 각 영역에서 "알아서" 규칙을 변형해 쓰게 된다. 이를 FM에 대비되는 AM(또는 heuristic)이라 부른다. 명시지가 다시 암묵지 (의도된 Spirit은 아니더라도)로 변형되는 소규모 집단 단위의 내면화 과정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행동의 근거는 Spirit에서 규칙으로, 그리고 다시 규칙에서 "적당한" 눈치로 전락한다.
한 콜센터의 예시를 들어보자. 콜센터의 Spirit은 많은 고객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집단에서 모든 사람이 그런 Spirit을 공유하리라 예상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은 월급만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사장은 KPI를 세워 시간당 가장 많은 고객의 전화를 받은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다. 그렇지만 이 법칙은 곧 Spirit을 잃은 휴리스틱으로 변형되는데, 즉 고객의 전화가 오면 받자마자 바로 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당 전화 수는 확실히 늘어났다는...
체계의 문제점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서 Christ -> Christian -> Christianity의 타락을 이야기한다. 분명 초기 기독교인들이 따르고자 했던 모범적인 삶은 교리나 생활 규범이 아니라 한 사람과 그의 불꽃같은 Spirit이었다. 예수는 어떤 명시화된 규칙을 세우지도, 체계화된 단체를 조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삶을 살다 갔다. 이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Christian이며, 이들이 모여 조직한 체계가 기독교, 즉 Christianity이다. 이 Spirit을 보편화/정규화 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는 과정에서 체계와 교리와 단체가 생겼으며 이로부터 현재 기독교의 많은 문제점이 파생된다.
소규모 집단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단체가 좋다. 감사하게도 지금 생활하고 있는 부대도 5~7명 정도의 정말 소규모 기지다. 반면 휴가 나갈 때마다 들리게 되는 부대 본부는 4~50명 정도 (이것도 작은 편이긴 하지만)인데, 관리해야 하는 인원수가 늘어남에 따라 추가되는 행정적 부담 (규칙), 그리고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Spirit의 부재가 불편하다.
소규모 집단은 비록 세상에 획을 긋는 영향력은 없을지언정, 딱딱한 규칙으로 타락하지 않더라도 상호 간의 Spirit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순수함 및 효율성을 간직한다. 규칙으로 소통하는 대신 면대면으로 소통할 수 있고 여유와 아량이 끼어들 여지가 높다. 물론 모두의 열정과 Spirit이 이어지는 초창기에 해당하는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