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블랑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

- 마태복음 5:6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아주 크고 뜨거운 무언가의 실체를 처음 느낀 것은 한 추운 겨울, 아직 겨우 중학생이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동생과 함께 아빠 손을 잡고 광화문 광장에 간 날이었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이 먼저였는데, 아직 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거리에서도 함성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점점 인파의 중심으로 향했고 메인 도로로 들어섰을 때에는 그 긴 거리를 따라 쭉 늘어선 행렬이 장관이었다. 뭔 말인지는 몰라도 가운데 확성기 달린 차에서 어떤 사람이 연설을 했고 사람들이 웃었다. 또 노래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굉장히 신나서 따라 불렀다.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연히 아빠 옆에 꼭 붙어 있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서로 밀치지도 않고 다 착해 보였으며 한 분은 나와 동생에게 반짝거리는 촛불 머리띠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걸 쓰고 군중을 따라 목청껏 외쳤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대한민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순간에 나를 포함시켜 준 아빠에게 감사하다.

최근에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완주하고 이어 <1987>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연 배우가 같아 본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를 울릴 뻔한 희귀한 영화에 속하며 (물론 최근 들어 좀 덜 희귀해지고 있긴 하다) 또 주제가 일맥상통한다는 공통점까지 가졌더랬다.

그 주제란 “어떤 것이 과연 사람을 목숨까지 걸게 할 수 있을까?”이다. 본래 진화의 규칙은 살려고 하는 유전자를 선호하지, 죽으려 하는 무용한 개체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보존, 생존의 욕구는 강력하며 보통의 경우 죽음의 위협은 사람을 무릎 꿇게 만든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 사람이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랴.

“본래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웃음 같은 거”

- 김희성, <미스터 선샤인> (그는 본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듯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죽을 줄 알면서도 불꽃 속으로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 자신들을 지키지 않는 나라를 위해 일어선 백성들의 후손이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항일의병이 되었으며,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이 <1987>에 등장하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 그 동지들이 되었다. 비록 누군가는 그 죽음을 무용하다 칭할지언정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보다 큰 무언가를 지키다 간 이들을 아름답다 칭한다.

분명,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강력하다. 앞장서 일본을 도운 매국노나 시민들을 폭행한 계엄군은 아니더라도, 내가 그 당시 일반 서민이었다면 의병이나 시위대를 도울 수 있었을까? 돕다 걸리면 큰일 나고 오히려 그들을 넘기면 삶이 풍족해지는데? 아마 <1987>의 연희처럼, 그렇게 싸워도 세상은 안 바뀐다고, 죽지 말고 가족이나 지켜,라고 하는 방관자로 살지 않았을까. 또 그렇게 살기로 한 사람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렇게 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 드라마를 어디서 처음 접했는지 떠올려보니 어렸을 때 파리바게뜨 앞에서 본 광고를 제외하면 육군훈련소 정신전력 교육 시간이었다(...) 최태성 선생님이 등장해 드라마의 일부를 보여주며 장병 여러분은 이 의병의 후손입니다, 했을 때 연출된 감정임을 알면서도 괜하게 숙연해졌던 기분을 기억한다. 사실 <미스터 선샤인>의 주된 내용 중 하나가 훈련소를 창설하려는 대한제국의 노력과 이를 막으려는 일본의 수작이다. 내가 억지로 다녀온 훈련소도 그때는 피 흘려 지켜내야 했던 것임을 떠올려보면, 또 당연히 여기는 직접 투표도 (최근에 내 인생 첫 투표를 했더랬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겨우 얻어낸 것임을 생각해 보면, 나는 아예 빚도 책임도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 할 수는 없겠다.

모두가 애국지사, 혹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요지는 아니다. 각자가 굶주려하는 의는 다른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과 자신보다 큰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의 삶은 확실히 구분된다. 사격을 할 때 아무리 목표물에 조준을 자 했어도 총보다 큰 무언가에 총을 단단히 뿌리박지 않으면 반동과 호흡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기 마련이다. 나 이상의 어떤 것, 지키기 위해서든 얻어내기 위해서든 혹은 사랑하기 위해서든, 그렇게 살 때 비록 무용해 보일지언정 아름답고 의미로운 삶이 되는 것임을, 의병의 이야기, 민주화 열사의 이야기, 순교자의 이야기가 증언한다. 지혜로운 누군가가 말했듯, 소확행에 만족해 살기에 인생은 너무 길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니, 살고자 아등바등했지만 역사 속에 죽은 매국노와 죽자고 달려들었더니 결국 모두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의 경우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불꽃은 무엇일까, 내가 굶주린 의, 그래서 이를 채우기 위해 부름 받은 영역은 어떠할까. 아직은 찾지 못한 게 당연하겠다 (공적 신앙, 세상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바라는 한 간사님의 바람이 따끔할 뿐이다.) 다만 과연 내가 그 소명을 찾았을 때, 그래서 항산(恒産)에 만족하는 삶과 소명에 이끌린 삶 가운데 선택해야 할 때 두렵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의 사수에게 나를 더 깊숙이 견착 하는 과정을 밟아야겠다 싶다. 앞으로 만날 광화문은 안전한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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