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미학
Blank Space가 이 공간의 이름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현대인에게 없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빈 공간”일 곳이다. “효율성”을 극도로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백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디지털 세계로 가는 표(스마트폰)를 들고 다니는 요즘, 공백을 채우기란 너무나 쉽다. 짧은 공백도 참지 못한다. 심지어 동아리 활동 중에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5분 동안에도 전부 휴대폰을 꺼내든다.
나는 하루에도 세 시간씩 통학을 하기 때문에 특히나 이 “공백”에 대한 인지, 그리고 “낭비”되는 시간에 대한 기피가 강하다. 광역버스마다 와이파이가 통하고 충전기도 달려 있는 시대기 때문에 공부나 진짜로 도움이 되는 일 외에 모든 것은 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 보기, 카톡 하기, 음악 듣기, 인스타그램 확인하기 등이다. 이렇게 공백이 남지 않게 꽉꽉 채우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다.
공통점이 있다. 나열한 모든 활동은 low-brain-energy를 요하는 반면, high-device-energy(동영상을 보면 배터리와 데이터가 매우 빨리 닳는다)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진짜로 중요한 일, 예를 들어 공부하기는 low-device-energy (강의 내용이 담긴 pdf 파일을 열어본다고 노트북의 배터리가 빨리 닳지는 않는다)를 요하는 대신에 high-brain-energy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공백을 이렇게 low-brain-energy 활동으로 채우다 보면 어느새 뇌가 이에 익숙해진다. 마치 우주에 나가 있는 우주인들이 근육을 안 쓰다 보면 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는 high-brain-energy 일을 하려고 해도 못한다. 진짜 채워야 할 시간을 밀도 낮게 채워버린다. 파레토의 법칙이 여기서도 성립하는 듯하다. 20%의 밀도 높은 시간 동안 80%의 일을 끝낸다. 그리고 80%의 시간 동안에는 20%도 못한다.
과연 공백이 있는 것이 비효율적인 일일까? 만약에 목적함수를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라 정의한다면 분명 공백이 있는 것은 비효율적인 시간 활용이 맞다. 그런데 그런 목적함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계산하기 쉬운 대체함수로 두뇌 사용량 * 시간을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분명 유튜브로 내 통학 시간을 채우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내 개인적인 경험인데, 전에 한번 이어폰을 집에 놓고 가는 바람에 통학 시간에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그날 통학하는 버스에서 블로그 두 편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리 봐도 후자가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남는 시간을 공부와 글쓰기 등 high-brain-energy activity로 채우는 것이 맞는 선택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일상에는 Blank Space가 있어도 된다. 잠을 자도 된다. 멍하게 있어도 된다. Cliché 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경험만 생각해 보아도 “창의적인” 생각은 이때 떠오른다. 수업에서 “현대인의 모순”으로 항상 바쁘다 하면서 남는 시간은 어찌할 줄 몰라 killing time을 하는 현상을 제시한 것이 기억난다. 남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채울 수 있는 기기가 내 손에 있다. 하지만 채우지 않을 자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린 왕자가 말했듯이, 갈증을 단숨에 해소해 주는 알약 앞에서 우물가로 천천히 걸어가는 Blank Space를 택할 수 있는 것이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