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 축소

방향과 크기

by 블랑슈

두 가지 개념

세상에는 여러 가지 관념이 있는데, 무언가 비슷한 관계를 이루는 개념-쌍을 많이 발견했다. 긴 목록 중에서 몇 가지만 뽑아보자면,


* 수학에서, 벡터의 방향(Direction)과 크기(Magnitude)

* 철학에서, 형이상학(Metaphysics)과 형이하학(Physics)

* 경영학에서, 목표(Objectives)와 핵심 결과(Key Results)

* 미학에서, 왜(Why)와 어떻게(How)

* 머신러닝에서, 그래디언트(Gradient)와 손실 함수(Loss Function)


등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한 것이, 방향 없는 크기는 위험하고 크기 없는 방향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크게에 대응되는 개념들의 공통점은 "비교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더 크고 작은지, 더 잘했고 더 못했는지, 더 이익이고 더 손해인지 바로 비교할 수 있다. 사람이 다섯 명 죽는 것보다 한 명 죽는 것이 낫다. 작위범은 부작위범보다 나쁘다. 깔끔한 비교다.

반면에 방향에 대응되는 개념들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들의 특징은 "다차원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트롤리 문제 같은 게 있다. 트롤리 문제가 딜레마인 이유는, 차원이 두 개이기 때문인데, 죽는 사람의 수와 작위/부작위라는 차원이 추가된다. 죽는 사람의 수를 줄이려면 의도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는다. 두 상황을 어떻게 바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차원 축소

나도 세상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확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다차원적인 "방향"을 오직 하나의 차원으로 축소시켜서 단순 "크기" 비교로 생각하려는 경향에서 세상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여기서 그 하나의 차원이라 함은 "나에게 당장 얼마나 이익인가"를 의미한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정치인들의 이야기부터,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으면 투정 부리는 나까지 그러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특징은 무시하고 "나에게 지금 주어지는 이익"으로 욱여넣어서 판단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때로는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공공선"을 위해 손해를 봐야 할 때도 있으며, "덕"을 위해 그의 잘못을 참아야 할 때도 있고, "거룩"을 위해 보이지 않는데 신뢰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생물은 진화 과정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이익"으로 판단하기 쉬운 것은 맞는 것 같다. (생각보다 자기 중심성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요즘 깨닫는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유전자의 지배만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익과 손해의 차원 말고 "가치", Why의 차원이 실존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


성공과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떤 상황, 행동을 단순히 "이익-손해"의 차원으로 해석할 때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차원을 무시하게 되는 것 외에도), 마음이 상당히 부서지기 쉬운 (fragile)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노력 대비 성과의 상관계수는 그리 높지 못한 것 같다. 공부의 경우가 그나마 높은 것 같은데 그마저도 절대 1:1 비율은 아니다. 공부, 일, 인간관계 등으로 갈수록 많은 노력은 그다지 결과를 좋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해당 태스크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너무 많고 복잡해서 랜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상황을 오로지 이익-손해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절반(이상)은 망한 날이 될 것이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또 학점도 좋아야 하고, 스펙도 좋아야 하고, 친구도 많아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노력을 덜한, 실패자가 되는 것인가? 단순히 지금 나에게 좋지 못하다고 해서 실패한 사건이고, 지금 원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성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려해야 할 차원은 많고, 새옹지마의 고사가 알려주듯이,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다.


전에 (수학)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인상 깊다. "성공과 실패, 이해와 손해의 사건들은 인생이라는 선 위에서 유한한 개수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생은 연속적이라서 무한한 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유한한 사건의 집합은 인생을 결정짓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매일 살아갈 때 가지는 마음가짐이다." 다분히 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했지만 생각해 볼수록 맞는 말이다. 성공을 어떻게 얻고 실패를 어떻게 피하는 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공했을 때 어떻게 살고 실패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렇게 걸어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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