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밀밭 길을 가다가 산길로 들어간다.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밭으로 만들기에는 약간의 계곡과 높이가 있어서 밭을 만들지 못하고 산으로 남아 있는 길이다
자연히 오르막이 있다가 내리막이 이어지는 고향에 있는 익숙한 길이다. 그래도 높지 않아서 힘들지는 않은 산길이다.
오늘은 처음부터 혼자 출발해서 혼자 가는 길이다. 앞에 가는 순례객이나 뒤에 오는 순례객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혼자 가는 길이다.
순례길 초입에 돌탑과 순례 왔다는 표시 리본이 달려 있다. 아마도 아직 먼 순례길을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의미일 것이다.
순례길에는 노인들과 젊은이가 함께 가는 길이다. 그냥 보기에는 노인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이 순례길은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하면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옛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노인들이 이 순례길을 많이 찾는 이유가 살아온 것을 돌아보고 자기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노년의 여유 시간에 자기와의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함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런 순례길은 걸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적합한 곳이지만, 현실은 노인들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삶이 고단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밀밭 길만 걷다가 산길을 걸으니까 덜 지루하기는 하지만, 힘은 더 든다. 날씨도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비가 곧 올 것 같다.
어제 숙소 마을이 달라서 헤어진 사람 중에는 사교적이고 활달한 동양인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고 가능하면 친구라고 호칭하면서 여러 사람들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조용한 사람도 있었는데, 일본 사람이었다. 그 활달한 사람이 일본 사람과 대화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일본 사람은 아니고, 중국 사람처럼 보였다.
너무 시끄럽고 행동이 커서 늘 주위에 가면 시끄러워 자리를 멀리하려고 했다.
그 사람은 때로는 다정하기도 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너무 촐랑대는 것 같다. 저런 사람이 무슨 일이든 적극적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확실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별로 정이 가지 않고 부럽지는 않았다. 중국 사람이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렇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행동하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이도 어느 정도 먹은 사람이 너무 나대니까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영어는 잘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발음이 귀에 익었다. 알고 보니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어느 나라는 어떻다는 말보다 각 개인은 어떻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런 사람과 떨어져서 어제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산길이 길어서 혼자 가는 길은 적적했지만, 얼마 가다가 보니까 앞에 덩치가 큰 젊은 세 사람이 산길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낮 선 젊은 서양인을 산길에서 만나니까 반갑기보다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니까 나를 더 유심히 쳐다보니까 더 주눅이 들어 빨리 지나갔다. 젊은 순례객인지 확인 못했지만, 확실히 긴장했었다.
산길이 끝나고 도로와 만나서 도로 옆길을 여유 있게 걸어간다.
오늘은 그렇게 먼 길이 아니고 중간에 있는 비아나 마을 하나를 지나서 로그로뇨라는 제법 큰 도시까지 20Km 정도 걸으면 되는 짧은 코스이다.
도로 옆길을 걷다가 보니까 양쪽에 심어진 쥐똥나무는 이제 꽃이 한창이어서 그 특유의 냄새를 풍긴다.
순례길을 도로와 같이 걷지 않도록 조성되었는데, 이 길은 도로를 오랫동안 걷는다.
도로 옆길을 혼자서 천천히 걸어가니까 내가 이 길이 끝나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도 생각하고, 이 길을 걸으면서 무언가 얻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까 나를 돌아보고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마음이 일단 들었다.
급하지 않고 무게 있는 삶과 남과 비교하지 않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순례길에서 다리만 아플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파하면서 다리의 근육이 단련되듯이 마음도 성숙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대체로 남과 비교하는 삶, 남을 의식하는 삶, 가까운 사람이 바라는 삶을 살아왔을 수도 있다. 혼자 산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런 삶이 강요되기도 하고, 사회 환경이 젊어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구조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이 들어서는 나만의 삶을 살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은 혼자 걸으니까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더 자유로운 마음이다. 마음속에 어떤 짐도 느껴지지 않고 힘들면 쉬었다가 천천히 걸어간다. 오늘 숙소지에 도착하면 맥주 한 잔으로 순례의 피로를 풀 것이다. 얼마 전에 해파랑길을 걸을 때 걷기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면 그 지방 막걸리로 피로를 풀고 작은 행복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직은 걸을 힘이 있고, 걷을 곳도 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지금 즐겁게 걷는 것이다.
비아나에 도착하니까 여기도 역시 성당이 도시의 중심이었고 성당의 종탑이 가장 높은 곳이다.
돌벽돌로 만든 집이 성당 주변에 있는 것이 오래된 마을인 것 같다. 이 마을을 나오다가 오랜만에 완전히 검은 고양이를 보았다. 스페인에는 길고양이를 별로 볼 수 없는 곳이다.
가끔 돌아보면 좋은 것도 있지만, 한참을 오다가 지나온 비아나를 돌아보니까 아름답다는 멋있는 마을이다.
멀리 오늘 유숙한 로그로뇨가 보인다. 큰 도시라서 멀리서 보이지만 거리는 십 리가 넘는다. 보기 드물게 소나무 숲길이 나 있다.
소나무 숲 길이 끝나고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노란 꽃이 만발해 있다.
앞서가던 노인을 따라잡아서 같이 걸어간다. 연세를 물으니 76세라고 하면서 혼자서 부지런히 걷고 있다.
노인들이 순례길을 젊은이들과 비슷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하는 것은, 쉬지 않고 계속 걷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보폭과 속도의 차이를 쉬지 않고 걷기 때문에 비슷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알베르게도 성당 주변에 가면 있을 것 같다.
로그로뇨는 에브로 강이 중심으로 흐르고 성당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잘 된 조경과 도로 옆에 색깔별로 핀 장미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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