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묵은 알베르게는 순례길에 한 도시에 하나씩 지정된 숙소인데, 안내문에는 8유로를 받는다고 써 놓고 10유로를 받으면서 그것도 현금으로 받았다.
그래도 시설이 좋으면 되는데 와이파이가 되지 않고 불편한 것이 많은 숙소였다. 그래서 어제는 블로그에 사진을 넣지 못했고 잠도 설쳤다.
아침에 출발은 했지만 별로 상쾌하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앞에 가는 이탈리아 남자 두 분을 따라서 갔다. 두 분은 걸음이 빨라 앞서가고 뒤에서 계속 따라서 걸어갔다. 내 뒤에는 또 다른 분들이 여럿 따라온다.
가리비 표시나 화살표를 보지 않고 앞에 가는 사람만 보고 간 것이다. 뒤에 오는 사람도 나를 따라서 계속 오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갔을 때 앞에 가는 두 사람이 길을 찾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벌써 많이 길을 벗어나서 제법 먼 거리를 온 것 같았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도 같이 모여서 순례길을 찾았지만, 가리비 표시나 화살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일행이 여러 곳을 헤매다가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순례길을 물어 다시 순례길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마음도 우울했는데 길까지 잃고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왜 여기를 걷는지? 걷기 연습을 하는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얻으려는지? 마음이 복잡해 온다. 지금 와서 또 갈등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마음이 그러니까 발걸음도 무겁다.
다시 큰 숨을 쉬면서 맑은 공기라도 실컷 마시자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끝까지 걸어보자는 것으로 마음을 추수렸다.
어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밭들을 보면서 걷다가 보니, 멀리 소 한 마리가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소는 아래를 보면서 순례객들이 제대로 걷는지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있는 마을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스페인은 소를 못살게 하는 나라이다. 투우에서 피가 솟구치고 끝내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환호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투우 경기를 관광상품으로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서 투우 경기를 하지 않는 도시도 생겨났다고 한다. 팜프로나에서는 시가지로 소 때를 모는 것을 축제까지 하고 있으니까 어느 나라보다 소를 괴롭히는 나라이다.
산 위에 소 모형은 그동안 괴롭힌 소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만들었으면 다행이다.
비록 소 모형이지만 순례객에게 말하는 것 같다. 순례도 좋지만 잔인한 투우 경기를 그만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소 모형이 멀어져 가는 곳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576Km 남았다는 표시가 있다.
800Km에서 제법 온 것 같다. 사실 시작을 하면 우리는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 순례길도 끝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다.
이 순례길을 마치고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이야기 하기보다는 힘들게 한 순례길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만 깊이 간직하고 싶다.
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이 부드러워 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부드러워지지 않는 마음은 확인할 수 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내 마음은 부드러워지려고는 하지만 부드러워지지는 않는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필요하고 준비한 것이 모두 온전하게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고 안심이 되지만, 하나라고 잃어버리거나 망가지면 리듬을 잃고 기분이 우울해지고 걸을 의욕까지도 위축된다.
안경과 수건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랬고, 어제저녁에 와이파이가 말썽이어서 또 그랬다. 이런 경우 마음을 추수리고 평상심을 찾으려고 해도 한동안 기분은 회복되지 않았다.
멀리 종탑이 가장 높은 마을이 보인다.
그곳이 오늘 가야 할 곳의 절반에 해당되는 곳인 것 같다. 마을로 들어가니까 옛적에 토기를 굽던 마을이었는지 토기에 관한 조형물이 많이 있었다.
이 마을을 지나서 다시 밭들이 나온다. 밭 중에는 독수리 모형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도 새들이 농작물에 손해를 입히는 것 같다. 그 독수리 모형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아 눈길을 끈다.
오늘 지나는 곳에서는 올리브밭과 포도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한 곳에는 순례객을 위한 것인지 돌로 이글루를 만들어 놓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 순례객들이 머물다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목적지인 나예라 도시에 도착했는데, 마침 장날이었서 장구경을 할 수 있었다.
과일과 채소 옷과 신발은 어느 장날과 같으나 배가 고파 시장 음식점이 있는지 찾아보니, 그런 음식점은 없었다. 처음 보는 납작 봉숭아도 사서 먹어 보았다.
나예라는 시냇물이 흐르고 언덕이 있으며 풍광이 좋은 곳이다.
뒷산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