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다. 오늘은 화창한 날이 계속될 것 같은 확신이 온다. 늘 해가 나와야 바르던 선크림을 오늘은 아침에 바르고 출발한다.
같이 묵었던 일행 한 분과 같이 말동무를 하면서 걸어간다.
처음에는 밀밭이지만 얼마 안 가서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도 오늘은 돌길이라서 걷기가 조심스럽다. 한참을 올라가니까 산길의 정상에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서 있다.
여기는 가장 높은 곳에는 십자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 같다.
십자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산술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하고 유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갔던 일행도 정상에서 뒤로 처져서 다시 혼자 걸어간다.
순례길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시간은 다르지만 보통 저녁이 되면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이 출발을 해도 걷다가 보면 떨어지기도 하고 앞서가기도 하면서 보통 혼자 걷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저녁에는 같은 숙소에서 만나니까 서로 인사하고 반가운 동행인 것이다.
순례길에 같이 가는 동행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걷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동행이 있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고 보통은 혼자서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동행을 하는 사람은 부부가 많고, 친구나 가족이 같이 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혼자 가면서 걷는 순례길이 좋을 수도 있지만, 실제는 같이 걸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걷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같이 걷거나 같이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같이 여행하면서 마음이 맞으면 즐거움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 반대가 되면 그 여행이 끝나는 시간까지 짜증 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순례길에서 같이 걷는 길은 계속 같이 속도를 맞추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걷는 길이다. 그렇게 같이 걸으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면 걷기가 힘든 것이다.
순례길에 같이 걷는 길은 의미 있는 동행이다.
오래 같이 산 부부가 서로를 배려하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걷는 순례길은 의미 있고 멋이 있는 길이고, 뜻 맞은 친구와 같이 젊은 청춘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면 걷는 길은 희망의 길이다. 또 부모님을 모시고 걷는 길은 부모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흐뭇한 길인 것이다.
순레길에 가장 많은 것은 부부 동행이다. 그것도 나이 많은 노부부의 동행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서로를 이해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면서 옛이야기하면서 걷는 것 같다. 나이든 노부부가 웃으면서 걷는 모습에서 순례길을 마음 먹고 걷는 것 같고,
같은 옷을 입고 허리굽은 남편을 위해 베낭을 메고 걷는 노부인은 늘 남편을 신경쓰는 느낌이다.
늘 같이 열심히 걷는 저 멕시코 노부부도 서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걷고 있다.
신혼부부도 신혼여행에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이혼 여행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결혼하기 전에 부부는 이 순례길을 같이 걸어 보는 것이다.
한 달이 많으면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를 같이 걸어보면 상대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서로가 마음이 맞는지를 알 수 있고, 어떤 성격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밀밭은 아직 푸르지만 제법 밀알이 영 그러 가고 있다. 그 푸른 밀밭이 바람이 부니까 푸른 물결이 파도처럼 치고 있다. 한차례 푸른 밀밭 물결이 치고 나가고, 다시 치면 파도치는 것과 같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아서 이 푸른 물결이 황금물결이 될 것이다.
순례길에서 가장 지루하고 힘든 것이 밀밭길 보다 도로를 걷는 길이다.
오늘 가는 곳은 스페인 북부에 있는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이다. 부르고스에 들어가는 순례길이 도로 길인데 한없이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혼자서 걷는 길에서 순례 표시가 있는 곳을 보고 걸어왔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앞을 보아도 순례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걸어간다. 그런데 순례길이라는 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직선 길이지만 수 Km를 아무런 표시가 없으니까 혼자 걷는 순례객은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불안한 것이다. 간간이 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부르고스 시내에 들어왔어도 표시가 없어서 길 찾는데 신경 쓰이게 만든다.
간간이 순례객을 나타내는 조형물은 눈에 들어온다.
이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르게 순례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표시가 표시나게 없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가는 중간에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멋있게 만들어 놓았다.
부르고스는 강 따라 걷는 길도 멋있고 나들이 나온 사람도 많다. 그런데 순례길 표시는 정말 인색하다.
순례객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내에 사람이 적으면 순례객이 표시가 나지만, 나들이 작은 배낭을 메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배낭을 멘 사람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부르고스 대성당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한잔하면서 즐기고 있다.
그 광장에 있는 순례객 조형물은 걷다가 지쳐서 숙소를 찾기 전에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도 광장에 앉아서 맥주와 이곳 사람이 좋아한다는 올리브를 시켜 놓고 여독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