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이 붉게 물든 하늘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넓은 평지의 바람을 피해 계곡에 마을이 만들어진 혼타나스 마을에서 계곡 위에서 다시 올라와 평지로 갈 줄 알았는데, 계속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서 간다.
계곡이지만 넓은 밀밭들이 있고 도로도 잘 만들어져 있다.
이태리 포플러가 가로수이고 우리 시골 마을 같은 풍광을 가진 도로와 밭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서 정겨운 모습이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아무도 없는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내 모습이 내가 상상해도 여유롭고 넉넉한 모습일 것이다.
처음에 나타난 것이 마을이 아니고 오래된 성당이 나왔다.
그 옛날에는 화려했을 것 같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그 모양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런 곳에 이런 규모의 성당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벽면에 조각들이 많이 있지만 거의 마모되거나 훼손되어 있다.
한참을 오려다 보다가 다시 길을 걷지만, 그 주변에 민가는 하나도 없는 벌판이다.
밀밭에 양귀비가 피어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다. 양귀비를 일부러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잡초처럼 밀밭에 나는 것이다.
밀밭을 잘 가꾼 곳은 양귀비꽃이 없지만, 양귀비꽃이 나도록 그냥 방치한 밭은 온통 붉은 꽃밭이다.
순례객을 위해서 관상용으로 밭에 양귀를 재배하는 것으로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양귀비가 하나도 없는 밀밭,
조금만 있는 밀밭,
상당히 많이 있는 밀밭이 구분되니까
아마도 양귀비를 재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밀밭을 잘 가꾸지 못한 곳에 양귀비꽃이 잡초처럼 자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밭은 온통 양귀비를 재배한 것처럼 온 밭이 붉은 밭이 있다. 그 밭은 순례객을 위해서 그렇게 조성했는지 알 수 없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오뚝 솟은 산 아래 조성된 마을이다.
그 산 아래 둘러 가면서 제법 큰 마을인 것 같다.
가까이 가면서 먼저 보이는 것이 성당의 종탑이다. 종탑이 보이면서 그 산 위에 바위로 보였으나 가까이 가니까 돌로 만든 성이다.
그 산 위에까지 돌을 운반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을은 규모가 크고 순례길은 대리석으로 잘 만들어 놓았다.
마을을 지나니까 앞에 큰 언덕이 서 있다. 순례길은 보통 언덕이나 산이 나오면 오르막을 오르지 않고 옆으로 평탄한 길을 갔었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는 길이 멀어서 언덕을 올라갈 것 같다. 역시 예상대로 언덕을 올라간다.
힘든 언덕을 순례자들은 묵묵히 오르고 있고, 자전거로 순례하는 사람들은 이 언덕을 죽을힘을 다해서 오르고 있다.
언덕에 올라보니 지나온 마을이나 넓은 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고 정상에는 순례길을 상징하는 석탑이 서 있다.
특히 방금 지나온 마을이 산 아래 잘 자리하고 있다.
언덕 위에서도 한동안 평지가 이어지다가 한참을 가다가 내리막이 나온다.
그 반대편 아래에도 넓은 평야 같은 대지가 펼쳐져 있다.
이제 내리막을 내려가서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을 걸어간다.
밀밭은 이제 익어서 황금빛을 내는 곳도 많이 보인다.
그런 밀밭을 기약도 없이 계속 걸어간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밀밭이다. 그래도 바람을 불어주어서 시원하기는 하지만 너무 지루한 길이다.
쉴 곳도 없는 밀밭을 걸어가다가 멀리 나무숲이 있어서 그곳만 바라보고 걸어갔다.
그곳에서 쉬어 갈 생각으로 걸음을 빨리해서 가보니 쉴 수는 있지만, 노점상이 자리하고 있다.
힘이 드니까 게이치 않고 쉬면서 신발을 샌들로 바뀌어 신었다. 이번 순례길에서 샌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일단 가벼우니까 좋고 발이 편해서 더 좋은 것이다.
오늘은 별다른 생각 없이 오직 걷기만 하기로 했다. 가끔 들판의 풍광을 감상하지만 매일 보는 그 풍경이다. 때로는 걷는 발을 보기도 하고 멍한 상태로 발만 옮겨 놓는다.
앞에 가는 서양 여자분의 엉덩이가 너무 큰 사람이 있다. 그런 육중한 몸도 계속 걸어가는 것을 보니까 관절이 아마도 튼튼한 것 같다.
노점상을 지나서도 십 리 이상을 밀밭 사이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다.
그다음에 큰 다리가 나오고,
다리 위에서 흐르는 강을 보니까 연어떼가 한 가로니 놀고 있고 물도 깊고, 량도 많았다.
다리를 지나서 우측으로 돌아서 가니까 나무 숲길이 아치를 만들어서 걷기가 시원한 길이 나왔다. 이런 길 같으면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멀리서는 밭에 물을 뿌리고 있고, 여기 밭에는 물뿌리는 시설을 거의 설치되어 있다. 이제 농사는 어디를 가도 기계와 시설이 없으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 넓은 대지에 수 만평의 밭에 곡식들이 자라고 있지만,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간간이 농기계들은 다니는 것을 본 적은 있다.
또 큰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 입구에 벽에 무슨 글씨를 쓰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제까지 본 낙서나 벽화와는 달리 깔끔하다. 그 벽화를 뒤로하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까 순례객에 대한 좋은 말을 써 놓은 것 같다.
다시 마을을 가로질러서 순례길을 계속 걸어간다.
오늘 목적지까지 10Km 남았다는 표시를 보았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이 424Km 남았다는 표시도 보았다. 800Km의 순례길에 상당히 온 것이다.
목적지까지 이제 지루해지는 시간이다. 아무리 가도 줄어지지 않는 길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끝이 보이는 곳까지 생각 없이 순례객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다가 지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서서 쉬다가 다시 걷는다.
지금 같이 걷는 사람들은 오늘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이때쯤이면 다음에 나오는 마을에서 하룻밤같이 쉬었다가 갈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지금 같이 가는 사람들이 오늘 밤 같이 보낼 사람들이다.
길고 멀게만 보였던 오르막에 도착하면 오늘 묵어갈 마을이 보일 줄 알았는데, 보이는 것 밀밭 들판이다. 그렇다 10Km가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다시 끝없는 밀밭 길을 걸어가니까 멀리 성당의 모습이 밀밭 끝에 보이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마을이 오늘 묵어갈 곳일 것 같은데, 그래도 가봐야 아는 것이다.
마을에 도착했다. 지쳐서 더 걷기가 싫은 상태이다. 다행히 이 마을이 오늘 묵어갈 마을인 “보아딜라”이다. 알베르게는 마을의 성당 부근에 있으니까 그곳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