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침실에 불은 켜지 못하고 빨리 갈 사람은 어두운 밤에서 조용히 자기 짐을 챙겨서 출발 준비를 한다. 나도 일찍이 준비하는 사람들에 속한다.
아침에 세면장에 가서 거울을 보니까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물론 내 얼굴이니까 낯이 익지만, 그보다 내가 아닌 낯익은 얼굴을 보는 것 같다.
내 얼굴이 할아버지를 닮아 간다는 것을 느낀다.
1905년 병오생 할아버지는 수염이 많지 않았다. 많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내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깍지 않아서 자란 흰 수염이 비슷한 것 같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상을 닮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렸을 때 본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오늘 세면장 거울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니까 넓은 들판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있다. 큰 강은 아니지만 많은 물이 아래도 흘러가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넓은 저수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긴 수로에 물이 가득 흐르면서 고이지 않고 흘러가니까 넓은 들판이지만,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로를 따라 걷는 길은 또 다른 기분이고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 오른쪽 발가락 물집도 말랐고 이제 아픈 곳이 없는 상태다. 아마도 또 아픈 곳이 나타날 때까지 잠시 휴식 상태인 것이다.
멀리서 지평선에 해가 떠오른다.
지평선에 해가 뜨는 것을 내가 사는 고향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지평선에 떠오르는 해를 이제 매일 보니까 수평선에 해가 뜨는 것같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 아침에 수로를 따라 걷다가 보니까, 앞으로 자존감 있는 당당한 삶의 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남들이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외톨이가 아니면서 친근하면서도 매력적인 무엇이 있는 인간적인 삶의 모양을 만들었으면 한다. 특히 혼자 있을 때 부지런을 떨면서 만족해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되지 말고 만나는 반가운 사람이 되고 싶다.
수로가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 곳에 가니까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끝없이 직선으로 수로가 이어진다.
바꾸어진 방향을 따라서 한참을 가다가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순례길은 수로를 따라서 계속 직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수로를 따라서 걷는다.
순례 표시는 없지만, 순례길은 보통 직선으로 만들어져 있고 수로를 따라가는 것이 직선이라서 의심하지 않고 계속 수로를 따라서 걸었다.
계속 걷지만 순례 표시는 보이지 않아 약간은 의심했지만, 직선 길이니까 표시를 생략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걸어갔다.
다시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순례 표시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잘못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멀리 와서 아까운 생각이 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돌아가지 않고 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냥 사람을 만나면 “까미로”만 외치면 이곳 사람들은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이른 아침에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 낚시하는 사람에게 물어 순례길 합류하는 길을 알았다.
순례길에 합류해서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숙쓰러워서 조용히 앞만 보고 걸었다.
순례길에 돌아오니까 혼자서 걷는 것보다 순례길을 같이 걷는 소속감을 느끼니까 마음이 편하다. 실제로 순례길을 걷는 지금은 어떤 곳에 소속된 감을 느낀다.
길은 다시 도로를 따라서 직선 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도로 바로 옆으로 순례길이 나 있지만 이 도로는 차들이 그렇게 많이 다니고 있지 않아서 걷기 괜찮다.
직선 길은 햇볕을 가려주는 나무도 없고 오롯이 태양과 같이 걷는 길이다. 다행히 해가 뒤를 따라 오기 때문에 햇볕이 얼굴을 비치지는 않지만 목이 햇볕 노출이 심해서 목이 화끈거린다. 중간에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기는 했지만, 햇볕은 오직 선크림으로 감당해야 했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지평선에 상당히 많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제법 큰 마을이다.
이 마을도 성당이 마을의 중심이고, 그곳에 순례객이나 마을 사람들이 한가롭게 모여 있다. 여기서는 한가로이 앉아 있으면 거의 맥주 한 잔은 가지고 있다. 맥주가 음료인 것 같다.
마을 중앙에 순례길이 잠시 앉아서 쉬는 동상이 있다. 나도 그곳에 앉아서 쉬면서 착하게 생긴 여자분께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다시 길을 떠나서 햇볕 속에 계속 걷는다. 고행은 아니지만 왜 걷는지 생각도 하기 싫고 오직 오늘 묵을 마을에 도착해서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피곤을 달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여기서부터는 순례길에 순례길 표시를 시멘트로 만든 표지석을 길 가운데 심어 놓았다.
직선 길이라 잃어버릴 염려는 없는데 친절하게 표시해 놓았다. 순례길 표시가 필요한 곳에는 부족하고, 단순한 곳에 너무 많이 표시한 곳도 많다.
이런 길을 6Km 이어지더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 들어서서 하늘을 보니까 구름이 너무 한가롭고 힘차게 떠 있다.
오늘 여기서 또 하루를 묵어갈 것이다.
들어선 마을에는 지쳐서 걷는 순례객의 동상이 맞이해 준다.
어느 알베르게에 묵을 것인가를 정하는데, 지금까지 해 왔듯이 순례객이 많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 들어간 알베르게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곳인데 너무 친절하고 표정이 밝아서 걷다가 지친 기분도 풀리는 것 같다. 숙박료도 8유로로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여장을 풀고 지금까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사워이다. 사워 실도 청결하고 파손된 것도 없이 따듯한 물이 잘 나온다.
다음에 하는 것은 식사인데, 식사를 하면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만이다.
식사는 이름은 모르지만, 옛날 엄마가 해주던 멧국수와 비슷해서 메뉴판의 그림을 보고 시켰다.
멧국수는 제삿날에 손으로 만든 국수를 건진 국수처럼 물기가 없애고 거기에 깨소금으로 고소하게 양념한 국수이다. 국수 가락도 비슷했고 양념소스도 고소하게 만들었지만,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은 아니다. 그래도 엄마 생각이 나는 맛이다.
그런데 생맥주를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데, 약간 세콤 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 시원한 맥주 맛을 기대했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한잔 더 마셨다.
핸드폰을 보니까 오늘이 6월 시작하는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