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장날은 분주하고 바쁜 날이다.
장터는 정겹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활기찬 곳이었다. 지금도 마음속에는 장날의 모습들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일장이 입암장이고, 그다음이 영양 장이다.
중학교가 있는 입암장은 장터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보다 약간 돌아서 가야 하지만, 장날에는 장터에 들러서 구경하고 집으로 왔다. 그때는 장터에 사람들이 많아서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때 오일장 날은 사람이 많아서 닮은 사람은 언 듯 보아서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종사촌은 입압장에서 우리 엄마를 보고 자기 엄마인 줄 알고 자기를 쳐다보지 않으니까 엄마 옷을 잡아당겼다고 한다. 사실 엄마와 이모가 너무 닮아서 엄마는 장에 가지 않았는데, 이모를 보고 장날 봤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별 신기한 물건도 많았고 장날에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면 인사하기가 바쁜 날이다. 어떤 사람은 복잡한 시장판에서 서로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서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날 우연히 사돈을 만난 것이다. 예부터 어려운 관계가 사돈인데 장날 우연히 만났으니 급하게 예를 갖추는 것이다. 어릴 때는 장 구경하다가 마을 사람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척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그때는 우리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동네 사람도 보면 누구 엄마나 삼촌이라고 대번에 알아보곤 했다. 오일장 날은 늘 활기차고 분주하던 곳이었다.
장날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에 장터 구경하면서 가다가 멀리 엄마가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서 집으로 간 적도 있었다. 엄마가 옥수수를 삶아서 시장 한구석에서 팔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랬다. 엄마는 고택에 딸린 텃밭에서 옥수수를 심어 장날 가지고 와서 돈을 만들어 필요한 곳에 쓰셨다. 오일장이 서는 전날에는 옥수수를 까서 벗기는데, 보통 가장 속잎 두 개 정도는 붙여 놓고 장날 아침에 삶아서 팔러 온 것이다. 그때는 옥수수 껍질 벗기는 것도 싫었고 장날 옥수수 파는 엄마를 보는 것도 싫었다. 지금은 읍내 장날 옥수수 파는 할머니를 보면 엄마 생각에 한참을 지켜보다가 옥수수를 산다.
장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분주했다. 버스가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는 영양 오일장은 걸어서 큰 재를 넘어서 물건을 이고 지고 갔다. 그 재가 하늘목재이다.
지금은 그렇게 높지 않아 보이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높아 보였고 시장에 팔 물건을 가지고 그 재를 넘으려면 땀에 흠뻑 저져야 했다. 하늘목재를 넘고 다시 신장로를 십리정도 걸어가야 영양장이 나온다. 오일장에서 볼일을 다 보고는 다시 신장로를 걸어와서 하늘목재를 넘어서 집으로 왔다. 그러니 장날은 하루가 온종일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버스가 들어오면서 장날은 초만원이었다. 사람과 장에 내다 팔 물건을 같이 싣고 갔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다 싣고 갔는지 신기했다. 그때 도로는 포장이 되지 않아서 버스의 움직임이 매우 컸다. 옆으로 흔들리는 것은 기본이고 상하로 널뛰기하듯이 움직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은 없었다.
그렇게 복잡한 버스도 몇 번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 버스에 또 공간이 생겼다. 그러면 다음 마을에 사람을 또 태울 수가 있었다. 복잡한 버스에서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는 잊지 않았다.
그때는 별도로 정류장이 없고 사람들이 손을 드는 곳이 정류장이고 내린다고 하면 어디든지 내려 주었다.
내릴 때는 흔히 유식하게 “하차”하고 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차 세워주세요” 하면 될 것 같은데 “하차”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동네 친구 할머니는 버스에서 내릴 때는 다 되었는데, 남들이 하듯이 “하차”를 외치고 싶은데, “하차”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급하게 소리친 것이 “섯차”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후에 할머니 별명이 “섯차”가 되었다.
시골장에 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장터에 가면 그때는 없는 것 없이 다 있었던 것 같다.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장날에 가서 술 한잔 사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곱창집에 가서 곱창에 소주를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그때는 곱창 가격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값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고추가격이 엄청 비쌀 때가 있었다. 고추 몇 근이면 술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때가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집에서 고추 두 근씩 가져가 장사꾼에게 팔아서 술을 사 먹었던 일도 생각난다. 나는 엄마가 말려 놓은 고추 두 근을 엄마 몰래 가져간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영양장에 가면 정겨운 곳이 있다. 바닷가에 올라오는 물가자미를 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물가자미는 보통 영해에서 아주머니들이 가져와서 시장 한쪽에 앉아 회로 썰어 주었다. 물가자미는 그물에서 건지면 죽어 나오기 때문에 살아있는 가자미를 보기는 힘들다. 물가자미를 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파와 채소 몇 가지를 넣고 초장을 넣어서 비벼서 무침회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는 내륙에 살아서 산 바닷고기를 회로 먹을 수가 없었지만, 그때도 영해에서 올라오는 물가자미 회는 먹었다.
우리 엄마도 시장에 가면 물가자미를 사다가 무침회를 자주 해 주셨다. 엄마 손맛이 든 가자미 회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엄마는 그때 그 회를 “미주구리”라고 하면서 사 오셨다. 지금도 나이 든 사람이나 영해에서는 아직도 “미주구리”라고 부른다. 일본말인 것 같다.
지금도 오일장에 가면 활기를 느낀다.
삶이 고단하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장터에 가본다. 장터에서 흥정하는 모습이나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의욕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오일장도 시골 인구가 줄면서 없어진 곳이 많아졌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던 입암 오일장도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어느 도시를 가던지 오일장 날이라면 옛날의 장터를 생각하면서 가보지만, 특별한 것이 없어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오일장마다 거의 비슷한 물건이 나온다. 오일장마다 돌아다니는 두부 장수, 어묵 장수, 생선 장수, 뻥튀기 장수, 옷 장수는 거의 모든 오일장에 다 있다.
그래도 시장 한 끝에 있는 그 시골 할머니들이 특산품을 갖고 나오지만, 그것도 나물이나 채소류가 대부분이다. 이제 그런 할머니들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고령으로 시장을 못 오시는 나이가 되었다.
예전에 정겹던 오일장은 줄어들면서, 오일장은 이제 여러 장을 돌아다니는 장사꾼과 대형 마트가 대신하고, 오일장마다 특색도 사라지면서, 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가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옛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장터는 아직도 추억의 장소이다.
장터에 가면 장날 거나하게 취해서 느린 느린 걸어가는 어른들을 상상하면 입가에 미소가 돈다. 이곳에서 만나는 할머니는 우리 엄마이고, 허리 굽은 할아버지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보는 듯하다. 아직도 장터에 들어서면 마음만은 설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