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병오생>
어느 중소도시에서 큰 병원 영안실에서 한 노인이 담배를 피우면서 한숨을 쉬고 있다.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 험한 일을 당한 것이다.
맏아들이 죽은 것이다. 불과 수일 전까지 그렇게 혈기 왕성하던 아들이 주검이 되어서 앞에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 병명도 모르고 정확한 처방도 못 하고 아픈지 며칠 만에 죽은 것이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들쥐가 옮기는 외래종 질병으로 영문도 모르고 죽은 것이다. 머릿속에는 생때같은 아들이 하루아침에 죽었기에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정신만 혼미한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고 거짓말 같은 상황에서도 노인은 다음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관을 고향으로 가져가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일단은 둘째 아들과 조카들에게 맏이의 죽음을 전달하고 주변에서 장례용품을 샀다.
장례용품이 영안실에 도착하고 둘째 아들과 조카가 도착하니까 입관을 했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갈 채비를 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도착한 둘째 아들과 조카들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건강하고 집안에서 일도 많이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집으로 빨리 가고 싶었지만, 관을 싣고 갈 차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저녁이나 되어야 차가 운행할 수 있다고 했다.
운구차는 저녁에 고향으로 출발했다. 그동안 고향에서는 초상을 알리고 장례준비를 집안 대소가들이 모여서 하고 있었다. 일부는 그사이에 시장도 가서 장례식에 쓸 제물이며, 손님들을 대접할 장보기도 해왔다. 노인이 도착한 것은 밤이 늦었다. 객지에서 죽었기에 집안에는 들이지 못하고 대문 밖에 있는 텃밭에 관을 안치했다.
노인은 그때야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큰손자를 본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큰손자를 보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셨다. 큰손자를 보고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난 걸 실감하신 것이다.
젊어서 혼자된 며느리의 울부짖음도 들으면서 아직도 철이 안 든 손자들이 6명이나 되니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노인은 앞으로 살아갈 삶이 무거워지는 것을 그 밤에 느꼈다.
노인은 병오생으로 1906년 태어났다. 그 당시는 을미사변 이후에 의병이 활발히 활동하던 때이다. 병오년에는 의병 활동이 절정기였다. 안익태 선생과 같은 해에 나셨고, 이병철, 피천득, 이상 보다는 서너 살이 많다.
산골에서 태어났고, 삼촌 두 분이 계셨는데 성격이 유하고 순한 분들이었다. 위로는 형님들이 두 분이 계시고 밑으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하면서 먹고 살기도 힘들어 배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어렵게 살았다.
태어나서 자란 곳은 솥바리 라는 지명을 가진 곳으로 그곳에서 오래 살다가 지금의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서는 변변한 토지도 없이 그냥 어렵게 먹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배웠고, 학문에 대한 배움의 갈망은 있었으나 기회나 여건이 되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다가 나이가 들수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당시는 돈이 된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느 곳이든지 갔었다고 한다.
먼저 막내 삼촌이 강원도에 가면 할 일도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평창에 갔다.
실제로 가보니까 돈을 벌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형님네 식구들도 모두 강원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때 본인도 평창으로 따라가서 그곳에서 결혼했는데, 신부는 고향 동네 사람과 했다. 평창에는 일가가 형성된 것이다. 강원도에서 처음에는 농사했지만,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다른 일을 했다. 배운 것은 농사뿐이지만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평창 주변에 다니면서 장사를 한 것이다. 본평과 대화장이 주 무대였다. 처음에는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나 하다가 나중에는 소 장사를 주로 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장터는 다 다녔고, 그 소설의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때 배운 장사의 기술과 감각이 나중에 큰 장사에도 도움이 되었다.
평창에서 일가는 주로 농사를 했지만, 일제 강점 말기에는 양귀비도 재배했다. 그리고 아편을 취급하면서 장사의 영역이 만주까지 넓어졌다. 주로 중국 국경에서 거래를 했고, 상대는 중국 사람들이다. 마흔 살 전후해서 활발히 장사하면서, 때로는 해상에서 물건과 돈을 서로 주고받는 위험한 거래까지 했다.
마침 해방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38선이 생겼다. 이때 검문이 하도 심해서 내려오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검문에 걸리면 사람은 내려올 수 있어도 물건은 압수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 번은 돈을 너무 많아서, 돈을 지고 내려와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냥 돈만 지고 오면 검문에 걸리면 압수가 되니까, 밑에는 돈을 가득 넣고 위에는 볍씨를 구해 넣어서 만든 망태기를 지고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검문을 당했을 때 볍씨를 구해서 간다고 하니까, 차림새나 모양새가 농부이므로 통과했다고 한다.
혼란기에 남북과 국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장사해 많은 돈을 벌었다. 한 번은 해주에서 해방되고 미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구걸하는 일본 사람에게 옷과 먹을 것과 여비까지 줄 정도로 마음이 여리기도 했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일가는 돌아왔다.
일가가 모두 돈을 어느 정도 벌어서 돌아오는 고향이었다. 이때 같이 갔던 여동생은 강원도 평창에서 출가를 시켰다. 그곳에 혼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강원도에서 딸 아들 형제를 낳았고, 고향에 와서 막내를 낳았다. 슬하에는 3남 1녀를 두었다.
고향에 와서 토지도 많이 샀고,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던 고향에서 가장 큰 기와집을 샀다. 고향에 와서는 막내지만 아버지를 봉양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쉰 살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농사만 했다. 원래가 부지런하고 근면했다. 참을성이 있고 대인관계도 좋았다. 오직 부족한 것은 글을 잘 몰랐다. 특히 한문은 잘 몰랐다. 고향에서 가까이 있는 도시에 볼일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상호이름은 알고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상호를 한문으로 써 놓은 것이다. 그래서 찾다가 도저히 못 찾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행인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본인이 있는 그 뒤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한자를 몰라서 앞에 두고서 그 간판을 못 읽었다.
그때 못 배움 것에 대한 서러움이 있어서 자식들에게는 학교를 시키려고 했다. 큰아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시험으로는 진학을 못 하고, 돈을 기부하는 보결로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맏이를 잘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돈을 들였지만,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토지는 아랫마을 앞에서 위치가 가장 좋은 곳에 바다 같은 넓은 논과 마을 바로 뒤에 가장 좋은 곳에 논이 있었고, 밭도 위치가 좋은 곳에 있었다. 농사를 열심히 해서 근면한 것으로는 주위에 인정을 받았다. 담배 농사를 한창 하던 때에는 오랫동안 담배 총대를 했다. 그 당시는 잎담배 생산이 농촌의 주 소득원이었다. 이때 강원도에 같이 갔던 삼촌이 돌아가셔서 그 집으로 양자를 갔다. 삼촌은 딸만 세 명이었다. 양자를 간 숙모가 같은 병오생이었다. 아들과 엄마가 나이가 같은 셈이다.
그 숙모가 나중에 훨씬 오래 살았다.
고향에서는 둘째 형마저 돌아가시고, 맏형과 두 분이 살면서 형 대접을 깍듯이 했다. 새해 첫날에는 형에게 세배도 들이고 세찬이라고 해서 반찬도 마련해서 대접했다.
딸은 출가를 시켰고 맏이와 둘째는 같이 농사를 지었다. 막내아들은 군에 가서 장교로 있었다
이때가 대체로 편안하면서 부농으로서 열심히 살던 때이다. 편안히 지내던 시기에 맏아들이 졸지에 죽은 것이다.
맏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 아들에게 딸린 손자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부담을 안고 살기 시작했다. 그때가 벌써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덟이었다. 본인이 늙어서 얻은 책임 때문에 어떻게든지 돈을 벌어야 했다. 손자들을 위해서 본인이 살아야 할 이유와 책임이 생긴 것이다.
먼저 한 일은 맏이가 지고 떠난 빚을 갚는 일이다. 맏이는 제대로 일도 안 하고 놀기만 좋아하다가 죽었지만, 더 곤란한 것은 죽은 뒤에 빛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평소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았기에 아들의 빚도 자기가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랫마을에 있는 바다같이 큰 논을 팔아서 청산을 다 한 것이다.
어린 손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던 농사도 더 열심히 했다. 나중에는 과수원을 시작했다. 사과나무를 심고서 그 사과가 클 때까지 중간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 과수원을 열심히 키웠지만, 열매가 본격적으로 나올 때 돌아가셨다.
군에 있던 막내아들이 전역하고서 사업을 시작했다. 사우디에 있는 건설 현장도 갔다 왔지만, 큰돈은 못 벌지 못했고 사업을 하려니까 노인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노인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친척의 급전을 내어서 사업 자금으로 주었다. 막내아들은 사업이 잘 안 되어 그 돈이 고스란히 빛이 되었다. 그때 돈을 빌릴 때 큰 기와집 문서를 주고 빌린 것이다. 갚으라는 독촉이 오니까 그 큰 기와집을 매매했다. 계약금만 받고 잔금은 못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이때도 내가 빌린 돈은 내가 정리한다는 마음이었다.
노인은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런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은 원래 생각이 없었다. 손자들에게 남겨질 재산을 조금이라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끝까지 손자들 걱정하면서 둘째 아들과 큰손자 앞에서 임종을 맞았다. 자식들이 쓴 빚을 갚는데, 바다 같은 논과 대궐 같은 집을 돌아가시기 전에 모두 처분한 것이다. 처음에 없었던 때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지만, 남에게 진 빚은 없었다.
20세기 초 병오년 격동기에 태어나서 20세기를 십칠 년 정도 남겨진 때, 78세에 돌아가셨다. 한일 합방과 일제 암흑기를 겪었고, 해방도 보았고, 6·25동란도 겪었다. 시대의 흐름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없다. 단지 소시민으로서 열심히 살았다.
누가 주목할 만한 것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만한 일도 없었다. 그저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열심히 일했고, 어떤 이의 도움도 없이 본인이 알아서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았다. 그것은 자식들을 위해서이고 집안을 위해서였다.
나이가 들어서 모친과 동생을 멀리 타국에 보내는 슬픔도 겪으면서 맏아들을 먼저 보내고 아내마저 죽고는 며느리와 같이 살았다. 수많은 일을 겪지만, 부지런한 천성과 순한 성정으로 큰소리 한번 치지 않고 살았다. 가슴 아픈 일은 맏아들을 먼저 보내고 마음에 멍이 되었다.
맏아들의 죽음은 편하게 살려고 생각하던 시기에 찾아온 불행으로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했다. 아들의 죽음은 마지막까지 본인 살아야 할 이유는 생겼지만, 마음은 죽을 때까지 답답하고 아팠다. 큰 고통 뒤에 십 년을 넘기지 못했지만, 끝까지 누군가를 위해서 살았다.
1906년 병오생 노인은 죽을 때까지 손자들을 위해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