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구댁

by 안종익


<흥구댁>

멀리서 선바위가 보인다.

고향으로 들어가는 길은, 산이 끝나는 부분에 서 있는 선바위와 건너편에 남이장군 형상을 한 바위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인다. 신비한 세계로 가는, 동화 속의 나라로 들어가는 마음이 드는 곳이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양편에 선 아름다운 기암절벽이 보이면 벌써 고향에 온 기분이다.

우리 엄마가 시집을 올 때, 멀리서 이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엄마도 시집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마을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촌일까"하는 궁금함이 앞섰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의 봄날과 꽃길을 꿈꾸면서 오셨으리라.


우리 엄마의 집은 “흥구”라는 마을인데, 우리 시골보다는 도시가 가까운 곳이고 도시로 나가려면 우리 마을에서는 엄마의 마을을 지나서 가야 한다. 엄마의 집도 시골이지만, 시집을 더 강촌으로 왔으니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 엄마는 바로 위 언니가 시집간 곳보다 더 먼 산골로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환한 미래만 기대하면서 선바위를 지났을 것이다.

그때는 먼 혼례길은 걸어서 갔다고 했다. 그래도 조금 사는 집은 혼례 치르러 갈 때 차를 타고 갔다고 하는데, 그때 이용한 차가 벌목하는 데 쓰는 트럭이었다.

우리 엄마도 트럭 앞 조수석에 타고 선바위를 지나서 하천을 따라서 만든 길로 시집을 온 것이다.


층층시하에 증조부까지 계시는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면서 크게 배우거나 벼슬과는 거리가 있는 집안이다.

시어머니는 변덕이 죽 끓는 듯하고 비위를 맞추기가 어려웠고, 며느리에게는 힘든 상전이었다. 우리 엄마는 마음은 한없이 여리지만, 싹싹한 성격은 아니고 고집도 있어서 갈등이 많았다. 갈등은 일방적인 시집살이가 되었고 거기에 남편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에 갔다. 남편이 제대 후에도 별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집 밖으로 큰소리가 자주 났다고 한다. 큰 소리가 난 후에 엄마는 쫓겨나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남편도 편들어 주지 않고, 별난 시어머니가 요란했으니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쫓겨나서는 친정까지도 가기도 하고, 중간에 언니 집까지 갔다가 돌아왔던 일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가 세월은 흘러서 아이 여섯이나 낳았다.

그 세월 동안 좋은 것도 있었겠지만, 가부장적인 가정에 별난 시어머니와 갈등하면서 목소리 죽이고 자식 키우며 산 엄마의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제 자식들 커가는 재미를 느낄만하고, 남편도 철이 들어가고, 시어머니도 성질이 죽어가는 무렵에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병원 간다고 나간 남편이 죽어서 돌아왔으니 그 기분은 앞이 안 보였을 것이다. 그때 울부짖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이들은 여섯 명이나 되고, 그때 막내는 100일이 지나지 않은 나이였다. 30대 초반 청상과부가 그 시절 분위기는 시집을 다시 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갈려고 해도 자식들이 눈에 발 펴서 못 갔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저세상에 간 신랑을 위하여, 일 년간 초하루와 보름에는 과일과 고기를 장만해서 제사도 지냈다. 제사 지내는 날이 젊은 나이에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원망과 본인의 박복함을 한탄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령의 시아버지와 농사일을 하면서 허리 펼 시간도 없이 밭일하다가 식사를 준비해서 어른들을 봉양하는 바쁜 삶을 살았다.

살던 집은 유명한 열두 칸 고택으로 딸린 텃밭만 수백 평이었다. 그 텃밭은 엄마가 시장에 가서 돈을 만들 수 있는 터전이었다. 겨울이면 땔감을 할 남자가 없으니까 땔감을 구하려고 동네 아낙들과 온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왔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 솔밭에서 “꼬질랑” 솔가지를 해서 군불을 넣으면서 “참 잘 탄다.”라고 하시던 말이 생각이 난다.

“꼬질랑” 솔가지는 낮은 산에 키가 나지막하고 송진이 많이 묻어 있어서 잘 타는 솔가지인 것 같다.


어려운 시기에 모친은 종교를 갖게 된 것이 큰 변화였다. 인생을 잘살아보려고 했지만 마주한 것은 절망이었다. 남편이 먼저 가고 나니까 사는 방향을 잃은 것이다. 이때 탈출구가 되고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을 만난 것이 종교였다. 그래도 시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생각도 못 했지만 돌아가시고 나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 먼저 간 남편을 원망도 하지 않고, 자식들을 잘살게 해달라고 빌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열심히 다녔다. 엄마도 죽으면 여기보다는 더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도 가졌을 것이다.


시간은 무심하게 지나고, 의지했던 시아버지와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엄마가 집안에 가장 어른이 되었고, 그동안 자식들도 장성했다.

엄마의 정성과 바램 덕분인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철이 들어서 본인들이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육 남매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각자가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엄마는 속 썩이는 자식은 있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고, 시 어른들이 다 돌아가신, 오십 중반에서 칠순까지가 가장 행복한 삶이었으라 생각된다.


그러나 한평생 일 만하다 보니까 건강관리가 되지를 않았다. 그 시간이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일 만하다가 몸을 돌보지 못하고 보낸 세월이었다. 먼저 온 것이 무릎 관절이었다. 그동안 너무 사용해서 온 퇴행성 관절염으로 너무 아파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관절에 고인 물을 뽑아야 했다. 그다음은 허리가 아파서 디스크 수술을 하면서 상태가 심해 허리에 핀을 받아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파킨슨으로 오래 고생하시다가 마지막에는 걷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 계신다. 자식이 여섯 명이나 되지만 같이 살 자식은 없다. 모두 먹고살기 바빠 같이 살 수 없다.


집에서 혼자서 오래 생활하시다가 거동이 힘들어서 병원으로 가셨고, 병원을 옮겨 다닌 곳만도 여러 곳이다. 몸은 아프고 움직임이 불편해서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생활이 되지만 그래도 집이 그립고 그곳에 살고 싶어서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가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다가 병이 심해져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병원에 있으면서 다시 집에 가고 싶어, 보는 사람마다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하소연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가 집에서 모시고 같이 있을 사람이 없기에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키운 자식들이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모시려는 사람이 없는 것이 자식 키워도 다 헛일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명심보감 증보편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은 ..

"부모님 봉양은 다만 두 분뿐인데도

언제나 안 모신다 형제끼리 다툼하네.

자식을 기를 땐 열 명이 되더라도

그대 홀로 그 자식들 모두 떠맡네.

자식이 배부른지 따듯한지 물어보지만

부모님이 주리신 지 추우신지 마음에 없네.

그대여 부모님을 봉양함에 힘을 다하오.

그대를 기르느라 옷과 밥을 빼앗겼소.“


요양원 생활이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지금 대부분 노인이 거동이 힘들면 요양원으로 가신다. 요양원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곳이고 일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는 좋은 곳이지만 거기 가는 노인들이 모두 좋아하는 곳은 아니다.

엄마 삶의 질은 불쌍한 수준이다. 저녁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조용히 넘어가는 해처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품위 있게 마무리하고 싶은 엄마의 생각은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아플 때 같이 있어 줄 식구는 없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가면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고향에 돌아갈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엄마는 이렇게 외롭고 답답하고 쓸쓸하게 홀로 보내고 있다. 이제 가까운 미래에 마지막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아쉬움과 그리움에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외로움에 지친 엄마는 현재 쓸쓸히 홀로 계신다.

고생하면서 키운 자식이 아닌 요양원에서 낯선 노인들과 같이 계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병오생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