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도 가려던 고향

by 안종익


<꿈속에도 가려던 고향>

복잡한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가 가끔 고향을 생각하면 한없이 포근하고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명절이 되면 힘든 귀향길이지만 고향에 가면 늘 반겨주는 엄마가 있고 그런 엄마가 있는 고향은 갈 때마다 마음 설레는 곳이다. 엄마는 늘 고향에 기다리신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의 고향은 엄마가 있어야 완전한 고향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처음 병이 왔을 때 칠순이 지나서였고, 파킨슨이라는 병이 생소했다.

파킨슨은 퇴행성 뇌 질환으로 손이 떨리거나 근육 강직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진행되는 병이다. 엄마는 파킨슨이 왔지만 오래 살 것이라 믿었고 오래 사시면서 고향에 가면 늘 반겨주는 엄마가 계시길 바랐다.


몇 년이 지나니까 걸음이 어둔해지기 시작하면서 병원에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래도 고향에서 늘 혼자 생활하고 계셨다. 자식들 집에 가서 사는 것은 한사코 거절하셨다. 모친의 병에 맞는 치료 약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좋다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치료 약을 많이 바꾸기도 했다. 병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서 약도 달라지니까 더욱 맞는 약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완전한 치료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것이 목적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몸은 안 좋아졌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없어지고 때로는 아파하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다. 아파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는데 본인은 오죽했겠는가?


엄마는 집에서 치료를 고집했다. 시설에 가는 것은 그렇게 싫어하고 안 간다는 의사도 밝혔다. 자식이 있어서 같이 있으면 좋지만, 모두가 자기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고, 엄마는 혼자 고향 집에서 생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요양원은 본인이 가는 것을 완강히 반대해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혼자서 거동 못 하면 고려하기로 했다.

도우미가 집으로 와서 청소해 주고 밥을 해 주었고, 가끔은 전동차로 마을을 돌아보기도 했다. 모친은 그렇게 편안히 사는 것을 좋아했지만 병은 계속 심해져서 그런 엄마의 희망도 힘들어졌다.

갑자기 아프면 이웃에 연락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니까, 이웃에서도 싫어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웃에서 엄마를 혼자 두면 안 되고,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자식들에게 하기도 했다. 엄마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잘 움직일 수도 없고 혼자 있다가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처음에는 요양병원에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셨지만, 가는 첫날부터 집으로 다시 가고 싶어 했다.


고향 목사님이 면회를 왔는데, 반가워하면서 처음 하신 말씀이 “고향 집에 데려달라”는 것이었다. 목사님이 설득하는데 진땀을 뺐다고 한다.

겨우 설득했다고 생각하면서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엄마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짐 보따리를 들고 책상 밑으로 기어서 목사님보다 먼저 밖에 나가 계셨다는 것이다.


늘 병원에 계시면서 침상에는 짐 보따리를 싸 놓고 계셨다.

언제든지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다. 집에서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서 조용히 살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그래서 누가 면회하러 가도 마지막에는 짐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간다고 따라 나셨다. 집이 그렇게도 좋아 던 것이다. 전화 있는 옆 사람이나 면회 온 사람에게 전화를 빌려서 자식들에게 틈만 나면 전화했다. “나를 집으로 보내 달라고….”

그래서 간호사들이 엄마에게 전화를 안 빌려주는 것에도 신경도 썼다.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집에서 혼자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본인은 살 수 있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집에 그렇게 가고 싶어 하셔서 집으로 모셨다. 그랬더니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셨다, 도우미는 집으로 돌아온 당시에는 병도 많이 호전되고 평소와 같이 생활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병이 악화하여 혼자서 두면 고독사가 염려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모셨다. 멀리는 경기도 일산부터 가까운 여러 곳을 옮겨 다니셨다.


엄마는 원래 머리가 좋으셨다. 자식들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계셨다. 그러던 엄마가 일산 때부터 자식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니까 다른 사람의 전화를 얻어서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파킨슨병은 발음이 부정확해져서 말이 전달이 잘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일산 때는 말씀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말이 잘 안 통하면 노트에 글씨를 써서 의사를 전달했다. 이런 글씨도 손이 떨려서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짐작으로 무슨 글인 줄 유추할 수 있었다.

주로 “집으로 보내 달라” 는 내용으로 그렇게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향 집에 가까운 요양원으로 옮겼다. 고향 요양원에 와서도 집에 가고 싶어 하셨다. 이곳에서는 나중에 이모님하고도 같이 계셨는데 자매가 처음에는 서로 알아보다가 나중에는 이모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니까 그렇게도 슬퍼하셨다. 그때만 해도 기억력은 좋았다. 가끔 치매 끼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가래가 목에 차서 숨을 못 쉬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 가래를 빼내기 위해서 호수를 넣어서 뺄 때는 고통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육신은 너무나 아팠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본인이 감당하면서 병상에 누워 계셨다. 긴 시간 동안 병과 싸우고 계신 것이다. 마지막 엄마 삶의 질은 너무나 낮았다.


고향 근처 요양원에 계실 때에 고향에는 자식들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면회하러 갈 수 없어서 자식들이 사는 도시로 다시 옮겼다. 그래서 엄마는 자식들과 자주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도시로 옮기고부터는 “집으로 가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 했기 때문이다. 연필로 글을 쓰는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식들은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엄마는 병상에 계시면서 꿈속에서도 고향 집에 가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정신이 있는 한 집으로 갈려는 마음은 변치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집이 천국이고 마음의 안식처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분주했던 추석날 아침